칼럼ㆍ기고 > 현장스님의 불교 속의 역사 여행

불심천자 황제 보살로 불린 양무제 이야기

미디어붓다 | mediabuddha@hanmail.net | 2023-07-07 (금) 14:09

양무제의 후손이 중국 근대불교 최고의 고승으로 손꼽는 허운 대사이다.


공주 박물관 뜨락에는 석련지 두 점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련지는 법당 앞에 연꽃을 심기 위해 만든 석조이다. 백제 성왕이 양무제를 위하여 세웠다는 공주 반죽동 대통사지에서 옮겨온 백제 유물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불심을 통한 양무제의 통치 철학은 삼론종의 계승자인 고구려 승랑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해지면서 황제와 군주들은 통치의 모델을 불교의 전륜성왕과 아쇼카왕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신라 법흥왕. 백제 성왕. 고구려 광개토대왕. 수문제. 양무제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백제 성왕도 전륜성왕의 줄인 말이다.



크게보기
양무제(사진=석현장 스님 제공)



양무제는 서기 502년 4월 8일 제위에 오른다. 그는 2년 후 초파일에 자신은 불법을 받들고 불법으로 세상을 교화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양나라 황제 소연이 머리 숙여 시방삼세의 거룩한 부처님과 법보님과 스님들께 예배드립니다. 엎드려 불경을 보니 보리심을 내는 것이 곧 불심이라는데 여타의 선법으로 비할 바가 없나이다. 여래께서는 중생들을 삼계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이끌고자 지혜의 횃불을 환히 밝히셨습니다.

이제까지 삿된 법에 물들어 살았으나 이제 미혹을 버리고 돌아갈 바를 알게 됐으니 정법에 귀의해 의지하겠나이다. 제가 미래세에 다시 태어나면 어려서 출가하여 불법을 널리 펴고 중생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기를 발원합니다. 원컨대 불보살님께서는 큰 자비로 증명해 주시옵소서.”

황제가 불법에 귀의하는 간절한 발원문이다. 무제는 궁궐 2층 중운전에 내불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승들을 수시로 초청하여 신료들과 함께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아무리 바빠도 빠뜨리지 않았다. 양무제 소연은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46년간 조석예불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제는 몸소 검약을 실천했다. 삼베옷을 입고 부들방석에 앉았다. 짚신을 신고 갈건을 썼다. 예기. 좌전. 장자. 노자 등에 주석을 달고 아육왕경. 공작명왕경 등 불경을 번역하고 스스로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금강경을 연구하여 32분으로 나눈 이는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이다.


불심이 깊은 황제에게도 걱정이 있었다. 불교 교단이 부패하고 승려가 존경받지 못하면 민중들이 불법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민이었다.

무제가 칙령으로 반포한 것이 출가자들의 술과 고기를 금하는 단주육문이다. 서기 511년 5월 무제는 고승대덕들에게 모두 서한을 보낸다.

“불제자 소연이 삼가 아룁니다. 지금의 출가자가 술을 마시고 육식을 즐기면서 죄의 원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공덕도 없고 인과도 없다는 범부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돈 주고 고기를 사면서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거리낌이 없습니다. 출가자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사람들이 불법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고기를 먹으면 대자비의 종자가 끊긴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자비란 일체중생을 다 함께 안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양무제는 앞으로 육식과 음주를 하는 승려에게는 강력히 처벌할 것도 밝혔다. 

“출가자가 여래의 옷을 입고도 여래의 행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되게 스님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도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 같은 이는 단호히 환속시켜 다시 호적에 편입시킬 것입니다.”

무제는 오직 허물없는 이라야 남을 지도할 수 있으며 스스로 깨끗한 이라야 남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부터 술과 고기 음욕을 멀리할 것을 천하에 선포하였다. 중국불교의 채식 전통은 양무제의 단주육문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무제의 불심은 갈수록 깊어졌다. 불사 규모도 점점 커졌다. 광택사. 법왕사. 개선사. 대경애사. 지도사. 동행사 등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그중에서도 527년 6년 불사 끝에 완공된 동태사는 천하제일 황실 사찰로 손꼽혔다. 지금의 남경 어디에서나 보이는 동태사의 구층탑은 양나라의 자랑이 되었다.

양무제는 사신(捨身)공양도 여러 번 하였다. 황제복을 행자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절의 노비 노릇을 하는 것이다.

황제로써 할 수 없는 일을 다한 이가 양무제이다. 3일에서 21일간 노비 노릇을 하면 대신들이 절에 노비 값을 지불하고 다시 궁궐로 모셔 오는 웃지 못할 일이 자주 있었다.

무제는 그런 황제였다.


양무제가 죽고 300년 후에 선종에서는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기록한다.

양무제의 후손이 근대 중국불교 최고의 고승으로 꼽는 허운 대사이다. 그는 근세 중국 백 년 역사를 몸으로 겪고 중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공산화 후에 제자들이 홍콩으로 망명하기를 권했다.

"나는 출가는 했지만 출국은 못합니다. 대륙의 부모 없는 자식들을 돌봐야 합니다."

116세에는 홍위병들에게 구타를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며칠간 혼수상태에서 도솔천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9년 12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지금 중국불교의 지도자들은 모두 허운 대사의 법맥을 잇고 있다.

양무제의 깊은 불심이 젖줄처럼 흘러 대륙의 불교를 다시 꽃피우고 있다.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