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물러남의 눈부신 가치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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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어제 해인사 원각 방장스님을 뵈었다. 인연을 맺은 지 30여 년 된 봉갑사 각안스님, 아내와 함께 동행했다. 방장스님은 아내의 도예전 때마다 특별히 격려해 주시던 자애로운 스님이시다. 공무는 퇴설당에서 보시고, 손님이 오면 화안당(和安堂)에서 맞이하시는데, 당호가 스님의 성품, 즉 화안(和安)을 드러내고 있어 집과 주인이 정확하게 계합한 것 같았다.

방장스님께서 우려주시는 보이차를 십여 잔 음미하면서 얘기가 오가는 동안 마음이 곧 편안해졌다. 나는 법문 중에서 안심법문을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하는데, 안심법문의 핵심은 자비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유연 씨가 집필한 <한국의 성씨 해설>이란 책을 드리면서 스님께 "각안스님과 저는 퇴설당에 청산처럼 계시는 방장스님을 의지하고 삽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다. 청산을 찾아온 흰 구름 백운이 나의 모습이었다. 초의스님이 자신을 청산에 든 백운으로 비유한 시(詩)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방장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각안스님 도반인 해인사박물관 관장인 관암스님을 뵈러 갔다. 관암스님 역시 방장스님처럼 첫인상부터 자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관암스님은 각안스님이 16세에 출가했을 때 행자반장이었다고 한다.  관암스님은 관장실에서 차 대신 빨간 딸기를 두 접시 내왔다. 나는 내 장편소설 <아소까대왕>(전3권)을 서명해서 선물했다.

마침 저녁공양 시간이 되어 나는 관암스님과 각안스님 두 분께 공양 올릴 것을 마음에 두고 관암스님이 추천한 해인사 초입의 식당으로 갔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식사를 하면 평소보다 더 먹는 것 같다. 편안한 마음으로 담소하다 보니 배가 불렀다. 관암스님은 헤어질 때 "대박 나세요!"하고 소탈하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스님의 자애로운 축원으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스님께서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하고 웃으며 대답하고 각안스님의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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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재 현관을 통해 보이는 마당 풍경이다. 마당의 꽃과 나무들이 그저 무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으로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관(玄關)이란 원래 수행자들이 마지막 무렵에 드는 그윽한 관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현관이 무엇인지 안다면 마당의 나무와 꽃들의 전언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삿된 생각을 하면서 현관을 드나들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겸연쩍기도 하다. 밖의 풍경은 더없이 맑고 아름답지만 그런 미안한 마음이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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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 꽃과 떨어진 꽃이 빛과 그림자처럼 대비되는 오후 한때이다. 영산홍 꽃은 피어 있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낙화의 시간이 되면 시절인연을 순순히 따른다. 반면에 인간은 대중의 주목을 받는 자리에 오르면 때가 지나도 물러가기를 주저한다. 낙화도 핀 꽃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터. 물러남과 비움의 눈부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 위인은 자기 자리와 명예가 영원할 것처럼 착각해 집착하는 사람일 것이다. 물러나고 비울 때를 알아야 한다. 편리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서 있는 듯 없는 듯 적막한 산중에 깃들어 사는 사람도 있는데, 자칭타칭 명망가들의 처신을 보면 물러남이 왜 어려운 줄 모르겠다. 사람의 뒷모습이야말로 참모습이 아닐 수 없다. 돌아선 사람의 등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등에 표정이 있고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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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후배이기도 한 일휴(一休) 김 화백이 그의 지인들과 함께 왔다가 차담을 하고 돌아갔다.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그의 화실이 있는 진도에서 나와 이불재까지 온 듯하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림만 그리고자 낙향하였는데, 뜬금없이 화실에서 가까운 곳에 대형 돈사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것이다. 진도군에 진정도 해보고 지인들에게 하소연해 보았지만 문제 해결이 난망한 모양이다. 나는 김 화백의 지인에게 말했다.

 “진도의 문화적 가치를 높여줄 화가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기업형 돈사를 짓는 업자와 미래의 진도를 누가 더 빛내주겠습니까? 행정을 하는 공무원들이 왜 그 가치를 모른다는 것입니까? 진도군민들이 나서서 막아야 합니다.”

나는 장편소설 <아소까대왕> 면지에 사인을 해주었지만 김 화백의 얼굴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진도로 돌아왔지만 몹시 실망하고 있는 듯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재력으로 돈사를 짓겠다고 하는데, 힘없는 화가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으리라. 자본이 예술을 위협하는 모양새이다. 상생보다는 약육강식의 문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건강한 것인지 묻고 싶다. 

추사와 초의의 제자인 진도의 화가 소치 허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울 뿐이다. <운림산방>이란 제목으로 장편소설을 구상해온 나 역시 집필하겠다는 열정이 다소 식는 것 같다. 진도군민들이 대중가수 송 아무개에게만 열광할 것이 아니라 진도의 춤과 무속을 화폭에 담아 진도의 정체성을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김 화백의 작업에도 큰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불세출의 남종화가인 소치가 유효기간 없이 진도를 얼마나 빛내주고 있는지, 진도의 가치를 알게 모르게 높여주고 있는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김 화백이 진도에 도착했다면서 휴대폰으로 말했다.

“선생님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버틸 때까지 버텨 보겠습니다.”

우리 속담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이 있고, <마태복음>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 천민자본주의가 팽배한 요즘이야말로 진주 목걸이와 돼지를 구분할 줄 아는 지성과 안목이 보다 더 요구되는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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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3일 통도사 서운암을 찾아가 성파 종정스님께 세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종정스님께서는 나의 장편소설 <아소까대왕>을 위해 추천사를 써주시겠다고 말씀했고, 그 약속을 지켜주셨다. 

나는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갚을까 생각해오다가 사랑방에 있는 주장자를 발견했다. 궁궐 목수 김 도편수가 나에게 선물한 주장자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주장자는 고급 가구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가죽나무로서 단면은 붉은빛이 났다. 생각이 나면 즉시 실천에 옮기는 것이 나의 습관이기도 하다. 

나는 즉시 주장자가 들어갈 긴 상자를 사각 박스를 해체한 뒤 가위로 잘라서 테이프를 이용해 만들었다. 그런 뒤 주장자에 비닐을 몇 겹 감아서 상자에 넣었다. 1미터 25센티쯤 되는 긴 상자를 우체국에서 받아줄 것인지 걱정했으나 택배 물건으로 취급해 주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종정스님께 직접 전화를 드렸다. 종정스님께서 좋아하시면서 5월 중에 이불재를 한 번 방문하시겠다고 하신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주장자가 종정스님께 잘 간 것 같다. 나에게 있으면 지팡이밖에 안 되겠지만 종정스님께 갔으니 비로소 주장자가 된 것이다. 물건이란 소유할 만한 주인에게 있어야 빛이 나는 법이다. 전화로 주장자를 만든 궁궐목수 도편수가 사찰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말씀드리자, 종정스님께서 옛날에는 사찰 목수들이 한양으로 불려가 궁궐을 지었다고 얘기해 주신다.

아무튼 종정스님께 드린 주장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정법(正法)의 단비를 내리는 법구가 되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예술가이기도 하신 종정스님께서 초파일 이후 하안거 결제하고 난 뒤에 조용히 왔다가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불재에 오시면 예술과 종교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많이 여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