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를 위하여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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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확)

그녀가 다시 담배를 들었다. 불을 붙여 주었다.

“저도 이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요…….”

내가 방문을 닫았다. 마구 타 들어가는 등잔불.

“당신 동굴에 가서 죽고 싶을 때가 있었어요!”

그녀가 내 어깨에 매달린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디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위를 살피며, 먹고, 자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절에서 뭐 배웠누?”

동봉 스님처럼 물었다.

그녀가 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을 만난 것 밖에. 아무것도!”

“동봉 스님은 언제나 절에 왔다가 가는 아이들 뒤 꼭지에 대고 이렇게 묻지. 절에서 뭘 배웠누?”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나예요, 나!”

“이 세상 누구도 누구를 만들지는 못해. 나를 만든 건 오직 나야.”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런 말은 있을 수 없지.”

“두려웠어요. 혼자 감당하기에는……, 당신이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어요. 다른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나도 아무 생각이 없었지. 보경이를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렇지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그런 건 아니야. 분명 그때는 생각이 있었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틀림없는 까닭이.”

“솔직히 말씀하세요.”

그녀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을 보세요.”

“눈 맞춤 좋지.”

그러나 농담 섞인 말은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당신, 내가 결혼한 아낙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요?”

“…….”

“그래서 내게 청혼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해도 이제 이야기를 접어야 될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당장 동굴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를 따라나선 것이 잘못이었다. 아낙은 아무리 꺼풀을 써도 아낙이다.

“세상에는 이야기하지 않아야 될 것이 있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있어요.”

그녀가 내 얼굴에 제 얼굴을 비볐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감상은 이미 물 건너가고 있었다. 둘 다 타오르는 등잔불만 바라봤다. 그녀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멀리서 들리는 밤새 소리. 새벽 예불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새소리 밝은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폐사 같은 절, 남장사는 무려 10개가 넘는 요사채를 거느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군데군데 흔적만 남은 건물의 잔해, 지붕이 날아간 요사채도 있고, 주춧돌만 남은 요사채도 있었다. 불탄 흔적…….

밤을 거의 꼬박 새웠는데도 몸 상태가 좋았다. 즐거운 아침 공양,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함부로 밖에 나올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정안 스님은 무언가의 일로 분주했고, 아침 공양을 마친 그녀는 남장 할머니라는 보살과 다른 요사채에서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꼭 고향 집에 온 것 같은 그녀의 얼굴,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생기였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그녀가 방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남장사 왼편으로 널브러진 언덕, 좁은 소나무 길이었다. 그 길을 지나자 억세게 자란 풀들의 천지, 전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풀밭이 나왔다.

그녀는 그 풀밭에 한참을 서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머언 낙동강, 그리고 남쪽의 연악산, 서쪽의 노악산, 북쪽의 석악산. 욱은 풀을 헤치고 그녀가 도톰하게 솟은 풀밭 무더기에다가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쓸쓸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앉으세요.”

그녀 옆에 앉았다.

“정말, 전망 좋지요?”

“어제는 몰랐는데, 우리가 산으로 많이 올라온 모양이지?”

“아니에요. 원래 낙동 쪽이 지대가 높아요. 청리산에서 줄곧 내리막길은 얼마 없었잖아요.”

“그래도 저 산들이 모두 보일 줄은 몰랐어. 여기보다 높은 청리산에서도 저 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거든.”

“여기는 앞에 가리는 산이 없잖아요.”

“가리면 안 보이는군.”

“저기 왼쪽 제일 큰 산 보이죠, 연악산. 저기에 갑장사가 있어요. 상주는 원래 성곽 도시였어요. 그래서 도시 바깥 사방에 절이 있죠. 남장사, 북장사, 승장사, 이 사장사(四長寺) 가운데 으뜸이다 해서 갑장사예요. 저어기.”

“난 상주 사람 아니고, 서울이나 평양 사람인가?”

“괜스레 해 본 소리에요. 저어기 널려진 경관 구경하려구요.”

“그런데?”

자꾸 딴소리만 하는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본론을 꺼냈다. 눈치 빠른 그녀가 대뜸 내 말을 알아들었다.     

“언니 얘기를 했었지요?”

“언니?”

“내게 어머니가 다른 언니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백방으로 알아봤지요. 물론 그때는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었어요. 반신반의였죠. 그런데 그 언니의 엄마는 우리 집 부엌 하녀였어요. 까맣게 몰랐어요.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보내졌어요. 그곳이 외설리 백천사였어요. 물론 그 언니도 숙부님이 거둔 거죠.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언니는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불을 때고 있는 언니와 첫 대면을 하는 순간 모든 반감이나 호기심은 사라졌어요. 언니는 날 보고 웃었어요. 나도 첫눈에 언니를 본 순간 내 언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어머니가 다르지만 나하고 많이 닮았어요. 처음 봐도 남이지 않은……. 언니는 아궁이 옆자리를 권했어요. 내가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불렀을 때, 내 손을 잡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어요. 내가 그냥 웃자, 밥은 먹었냐고 물었어요.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자,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어요. 그리고 우리는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잤어요. 언닌, 젖먹이 때부터 절에 있었어요. 남장사로, 갑장사로, 북장사로, 그리고 백천사로. 아버지가 그렇게 했는데도……, 언니는 날 보면 언제나 웃었어요. 파랗게 머리를 깎고, 창백한 얼굴로 목탁을 두드리는 언니를 보면 난 항상 울었어요.

이 백련사는 1921년 상주에 민란이 일어났을 때 항일 의병들의 집결지였어요. 그래서 그 후 일본 경찰의 주요 감시 사찰이었고, 물론 해방된 뒤에도 이곳은 일본 경찰이 아니라 우리 경찰의 감시를 받는 곳이 되었어요. 빨갱이들이 많다고……. 아무래도 백천사보다는 이곳이 요지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언니가 일본 경찰에게 꼬리를 잡힐 무슨 일을 꾸미다 발각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언니는 끝까지 이 절을 떠나지 않았어요. 서에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언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갔죠. 그렇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 거예요. 결국, 이 백련사에서……, 난 언니가 죽어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봐야 했어요. 무서운 일이었죠. 가족 누구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언니는 내 손을 잡고 희미하게 웃으면서……, 언니의 육신은 처참하게 죽었지만, 언니는 곱게 죽었어요. 아마 오늘 같은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 겨울, 난 이곳에 언니를 묻고 백천사로 떠났어요. 불쌍한 언니의 기억 때문에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난 달라졌어요. 난 아버지의 딸도 아니었고, 더 이상 가족 누구의 소유물도 되기 싫었어요.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 나라 사람이 되기도 싫었어요. 그러나 난 백천사에 피해 있으면서도 틈만 나면 삼십 리 먼 길을 걸었어요. 언니의 무덤에 오면 편했어요. 아마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여기 이 무덤에 있을 때 일 거예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곳은 아마 노악산 전체에서 제일 오래 햇볕이 있는 곳일 거예요. 언제나 달그림자처럼 음지만 밟고 자란 언니에게 내가 해줄 일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이곳은 저 멀리 작은 도랑 너머 낙동강의 푸른 물결까지 보이니까요. 그러다가 날이 저물었지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