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으로 읽는 불교
“크고 싱싱하지만 가짜 줄기인 것처럼”
이 학종 2023-06-02 (금) 08:01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파초(芭蕉)’ 하면 떠오르는 김동명(金東鳴, 1901~1968) 시인의 대표 시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이 시는 원산지를 떠나와 이국(異國) 땅에서 자라나는 파초를 통해 망국(亡國)의 한을 노래한 작품이다. 파초는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나는 관상용 다년생 식물로 이 시에서는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물로 쓰이고 있다. 시인은 따스한 남국을 떠나와 추운 이 곳에서 가련하게 살아가는 파초의 운명을, 자유를 잃고 조국을 떠나 살면서 항상 조국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와 빗대어 그리고 있다.
관엽식물로 줄기는 가짜 줄기[僞幹]이며 여러 장의 잎싸개[葉鞘]로 되고 높이 5m 내외까지 자란다. 가짜 줄기(헛줄기)여서 얼핏 단단한 나무줄기처럼 보이지만, 단단한 나무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뿌리줄기 끝에서 돋은 잎이 서로 감싸면서 원줄기처럼 자란다. 어린잎은 돌돌 말리고, 자란 잎은 긴 타원형이며 길이가 2m나 되고, 잎의 가운데 맥 좌우에 많은 평행맥이 늘어선다. 여름철에 가짜 줄기 속에서 꽃대가 나와 여러 개의 꽃을 피운다.
파초의 전체 모양과 꽃, 열매는 바나나와 무척 닮아서 구별이 잘 안된다. 그러나 바나나에 비하면 결실성이 아주 떨어지고, 열매가 열렸다 하더라도 바나나보다 작고 먹을 수도 없다. 파초는 잎이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화조화(花鳥畵)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강희안(姜希顔)도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화목류를 9품으로 나누어 평할 때, 파초를 앙우(仰友)·초왕(草王)·녹천암(綠天菴)이라 부르면서 부귀한 모습을 취하여 2품에 올렸다.
파초는 초기불전인 <맛지마니까야>에도 설법 소재로 등장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붓다는 이교도의 도전에 언제나 당당하게 응했다. 특히 이교도가 붓다의 교설을 비판하며 대론을 청할 때에는 상대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깨뜨려 조복을 받았다. 붓다에게 맞서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삿짜까(Saccaka)라는 니간타, 즉 자이나교의 추종자도 여러 도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론에 관한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든 자신과 토론하여 떨지 않고, 전율하지 않고, 크게 감동받지 않고, 겨드랑이에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며 으스댔다. 어느 날, 그가 웨살리의 거리를 걷다가 앗싸지 존자를 발견하고, 수행자 고따마는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치느냐고 물었다. 앗싸지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삿짜까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어느 때라도 붓다와 만나서 어떠한 논쟁이라도 할 수 있으며, 그를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는 릿차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따마와 토론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이렇게 해서 붓다와 웨살리의 마하숲에서 만난 삿짜까는 당돌하게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그리고 어떻게 일반적으로 수행자 고따마의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전해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삿짜까에 ‘무상, 무아’를 제자들에게 가르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삿짜까는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은 물질은 나의 자아, 느낌과 지각, 형성, 의식은 나의 자아’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붓다는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그의 오류를 드러내 주었다. 이 내용은 <맛지마니까야> 큰 한 쌍의 품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에 등장한다.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악기베싸나[쌋짜까 종족의 명칭으로 붓다는 이 경에서 삿짜까를 종족명으로 호칭했다.]는 두 번의 물음에도 침묵한 채 해명을 하지 못했다. 세 번째 물음에도 답하지 못하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이라는 경고와, 그 자리에 있던 야차 바지라빠니(제석천)의 경고가 있자, 쌋짜까는 두려움으로 전율하고 몸에 털이 곤두서서 세존께 보호를 청하고, 피난을 청하고, 귀의를 청하며 붓다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시면 답변하겠다고 말했다. 붓다와의 문답은 이렇게 시작된다. 붓다가 삿짜까에게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 그대의 자아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삿짜까는 자신의 견해를 바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붓다는 ‘그대의 말은 앞은 뒤와 일치하지 않고 뒤는 앞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영원합니까? 무상합니까?”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까? 즐거운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 전재성 옮김
붓다는 계속해서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해 묻고, 삿짜까는 괴로운 것이며, 그것을 나의 것이고, 나이고 나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답한다. 붓다는 이때 파초의 줄기를 예로 들어 삿짜까의 잘못을 일깨운다.
“악기베싸나여, 예를 들어, 나무심이 필요해서 나무심을 구하려고 나무심을 찾아 돌아다니던 사람이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커다란 바르고 싱싱하고 아주 높이 자란 파초 줄기를 보았다고 합시다. 그가 그것을 뿌리에서 자르고, 뿌리에서 자르고 나서 꼭지에서 자르고, 꼭지에서 자르고 나서 잎의 껍질을 벗겨낸다고 합시다. 그가 거기서 잎의 껍질을 벗겨낸다고 해도 거기서 나무껍질도 찾지 못할 것인데 어디에서 나무심을 구할 수 있습니까? 악기베싸나여, 이와 같이 그대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내가 규명하고 반문하고 힐문하자, 그대는 스스로 텅 비고 공허해지고 패했습니다.” -전재성 옮김
붓다는 헛줄기인 파초줄기의 특성을 잘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텅 비고 공허한 주장과 논리로 교만에 젖어 있는 삿짜까를 파초의 헛줄기에 비교해 그가 저지른 잘못과, 삿된 견해를 통쾌하게 일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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