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같은 붉은 연꽃이여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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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오늘은 어머니 생신날, 더불어 내일은 어버이날. 나의 어머니는 나와 띠동갑으로 올해 세수 96세이시다. 아내가 식당을 예약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 자매, 사위, 조카와 함께 정담을 나누며 식사했다. 어머니를 모셨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계시기에 형제자매들이 모인 것이다. 어머니의 여전한 구심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께서 각별하게 사랑하는 손자 현기가 꽃바구니를, 우리는 각자 봉투를 드렸다.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아내는 어머니를 껴안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며느리의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께서 아내에게 "아이 러브 유"라고 말씀하시어 가족 모두가 웃었다. 아무쪼록 100세까지 만수무강하시기를~ 나는 그때까지 어머니의 자애로운 구심력이 순일할 수 있도록 오직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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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5.18광주민중항쟁 40주년 때 <광주아리랑>(전2권)을 발간했다. 광주일보 창사 60주년을 기념해서 연재한 장편소설이었다. 지금은 43주년이 됐으니 3년이 지난 셈이다. 보름 전, 두 단체에서 기념식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부탁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작가는 마이크보다 글로 말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무슨 단체이든 평소에 가깝게 하지 않아 왔던 나의 심리도 적잖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나는 작가들의 단체인 한국문인협회마저 외면한 채 독립군처럼 글을 써왔던 바, 이제는 고착된 내 스타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처음부터 중간 유통 단계 같은 무슨 문학잡지나 유명한 평론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단기필마로 독자와 직접 소통해 왔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무등산을 보고 자란 작가로서 80년 5월을 함께 하지 못한 부채의식으로 40년 동안 시달리다가 집필했다고나 할까, 그때 나는 서울 상명사대부여고 국어 교사였던 것이다. 아무튼 40년이 지난 뒤이기는 하지만 <광주아리랑>을 씻김굿 하듯 발간했으므로 가슴이 따뜻한 광주시민에게 조금이나마 염치가 생겼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았을 뿐이다. 호남 출신의 작가로서 그때 섬처럼 고립되었던 광주에게 늦었지만 예의를 지켰다고나 할까. 나는 지인이나 후배작가들에게도 시가 됐든, 희곡이든, 동화가 됐든 그날의 광주를 글로 남기자고 말한다. 이유는 단 하나, 망각하면 진실이 묻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망월동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무겁기만 하다. 망월동 묘역 한가운데 항쟁 기간에 홍보부장을 맡았던 죽마고우 박효선이 잠들어 있다. 박효선은 항쟁 마지막 날 밤 기적과도 같이 도청 앞에서 탈출하여 노동자로 변복하고 광주를 벗어나 서울 내 자취방에서 숨어 살면서 도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는 몇 년 후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을 떨쳐내버리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2023년 5월 18일. 무덤의 주인들은 말이 없는데, 추모하는 사람들 중에는 진심으로 생화(生花)를 바치는 이도 있고, 자신을 속이며 거짓꽃[造花]를 바치는 이도 있다. 

 이처럼 우울한 두 개의 현실은 내년에도 계속될 것 같다. 그러나 진실이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자.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자. <광주아리랑>을 발간한 나의 의도는, 작가로서의 염원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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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재에 영산홍이 낙화하자, 이번에는 불두화가 피어나고 있다. 불두화 빛깔은 처음에는 연둣빛이었다가 차츰 초파일이 가까워지면 흰빛으로 바뀐다. 크기도 처음에는 만두만 하다가 점점 갓난아기 머리통만 해진다. 불두화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부처님 머리 같은 꽃인데, 대개는 절 경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불재 불두화도 10여 년 전에 쌍봉사 옛 다성암 앞쪽 지금의 종각 옆에 있었는데, 그때 주지스님이 두어 뿌리를 파주어 이불재에 심었던 것이다. 지금의 다성암은 종무소 가는 쪽에 있다. 다성암을 불사할 때 내가 당시 주지스님의 요청으로 암자 이름을 작명했던 기억이 난다.  

 쌍봉사는 철감 도윤선사가 창건한 절로 철감선사는 28세 때 당나라로 건너가 남전선사 문하에서 "차나 한 잔 마시게"라는 법어를 남긴 조주선사와 함께 공부했던 스님이다. 그런 차와의 인연으로 철감선사가 귀국할 때 차씨를 가져왔는지 쌍봉사 주변은 물론이고 이불재 앞 산자락까지도 야생 차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성암(茶性庵)이라고 암자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이번 초파일 행사 때 작년처럼 나보고 또 축사를 요청할지 모르겠다. 만약 요청한다면 1970년대 중반에 서울의 대학가에서 반독재데모로 인한 잦은 휴강 기간에 모포 한 장, 치약 칫솔 한 개씩, 수건 한 장을 배당에 담아 쌍봉사로 내려와서 머물곤 하다가 어느 가을날에 대웅전 부처님 미소를 보고 내 나름대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부터 나는 불교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던 것이다. 아침에 불두화를 보니 절로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초파일이 며칠 남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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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8시에 이불재를 떠나 논산 개태사로 향했다. 개태사에는 내 나이 32살 때 상사로 모셨던 양산스님께서 주석하시고 계셨다. 40년 만에 뵙게 될 양산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불교사상> 사장스님이었고, 나는 편집장 역할까지 하는 편집차장이었다. 회장은 조계종 총신도회장 최재구 전 국회의원, 주간은 동국대 불교학과 송재윤 교수였다. 편집위원은 동국대 국문과 홍기삼 교수, 동국대 윤리학과 송석구 교수 등이었다.

 나는 월간 <불교사상>을 창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대학시절 쌍봉사에 빚졌던 밥값을 갚을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상명사대부여고 국어 교사 생활을 접고 '불교사상사'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사상사'는 총무원의 재정 지원이 끊기자 불과 2년 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샘터사로 또 한 번 더 자리를 옮겨가야 했다. 그래도 나는 '불교사상사'에서 근무한 2년을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때 불학(佛學)이 사뭇 깊어졌고, 많은 절을 순례하면서 여러 수행자분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오전 11시쯤 개태사에 도착했다. 운전은 심안(心眼) 나상규 선생이 해주어 그의 성품대로 편안했다. 개태사는 평지 사찰로 도로변에 있었는데, 중창 불사를 끝낸 지 얼마 안 된 듯 조금은 어수선했다. 아내가 종무소로 먼저 들어가 용건을 말하고 연등까지 접수했다. 나는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으니 내 이름 옆에 소설가를 써달라고 사무장에게 부탁했다.

 마침내 80세 된 양산스님 방으로 들어가 차담을 했다. 스님은 여전히 소탈하시고 에너지가 넘쳤다. 처음으로 외할아버지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제자로 독립운동을 했고, 또한 제헌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국민대학을 설립한 효당 최범술 스님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내가 "스님, 왜 불교사상사 시절에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여쭙자, "중이 속가 인연을 왜 말하노!" 하신다.  

 사과와 배를 손수 깎아주시고는 효당스님의 제다법으로 오래전에 만든 차라며 "이 발효차  마시면 오장육부가 좋아진데이" 하면서 자꾸 권하신다. 얼마나 반가우신지 지역구 야당 국회의원이 초파일 인사차 찾아왔지만 종무소에서 잠깐 만나고 스님 방으로 되돌아오신다.

 우리는 점심 공양을 한 후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산문을 나섰다. 스님께서 산문까지 따라나오시더니 우리가 주차장으로 내려설 때까지 손을 흔드신다. '불교사상사' 시절 이견이 생길 때마다 스님께 고집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일도 정(情)이 되어 보석처럼 빛나는 것 같다. 

 두 번째 들른 절은 무등산 자락에 새 둥지처럼 자리 잡은 광륵사. 동국대 고익진 박사의 어머니께서 일구신 작은 절로서 지금은 고박사의 애제자인 인행스님과 법연스님이 계신다. 절 경내에 고익진 박사님의 묘탑이 효성스러운 두 분 스님을 신장님처럼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아내는 연등을 접수하고 나는 최근에 발간한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을 두 분 스님께 선물했다. 나상규 선생이 두 스님의 법담을 듣고는 환희심을 낸다. 나 역시 동국대 후배이기도 한 두 분 스님을 뵐 때마다 한국불교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충만해진다. 

 이불재로 떠나려고 하자 두 분 스님께서 고익진 박사 원적 35주년 추모 법공양으로 발간한 <불교의 체계적 이해>란 생전의 고익진 박사 저서를 나와 나 선생 몫으로 두 박스를 차에 실어준다. 인연 되는 이들에게 나눠주라는 뜻일 터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유기적인 관점에서 저술한 책이라고 하니 나부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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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재 연못에 홍수련 세 송이가 피었다. 백수련은 꽃봉오리가 부풀어 올라 있다. 홍련은 어머니 즉 생명의 모태를, 백련은 지혜를 상징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지 않을까 싶다. 옴마니 반메훔이란 어원이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같은 붉은 연꽃이여'라고 하며, 백련은 <묘법연화경>이란 경전 이름 속에 들어 있으니 말이다.

 연꽃을 볼 때마다 인도와 스리랑카 여행 때가 생각난다.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사 입구에 들어서자 참배객들이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 헌화하고 있었다. 불단에 연꽃이 수북이 쌓이면 관리인이 빈 통에 담아 밖으로 내놓았다. 그러면 참배객들이 그 연꽃을 들고 법당으로 들어가곤 했다. 연꽃이 버려지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돌고 도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부처님께 향하는 일심동체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스리랑카 캔디의 불치사에서는 어린 초등학생들이 이른 아침인데 고사리 같은 손에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삼삼오오 불치사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학교로 가기 전, 절에 먼저 들어가 부처님께 헌화하는 것이 어린 학생들의 전통인 듯했다. 순간 나는 어린 학생들의 유난히 하얀 치아 같은 순수한 마음을 보고 "아, 여기가 바로 극락이구나!" 하고 감탄했던 것이다. 

 오늘은 불기 2567년 부처님 오신 날. 쌍봉사에 내려가 신도회 고문 자격으로 축사했고, 연꽃이 아닌 장미꽃을 헌화했으며, 관욕식에 참여했다. 내년에는 이불재 연못의 연꽃을 들고 가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