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주의 알아차림 행복

정찬주의 마음챙김 행복16

정 찬주 | | 2023-05-17 (수) 07:27


                    ‘중생을 떠난 부처’는 생각할 수 없다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연못가에 할미꽃을 심지 않았는데 할미꽃씨가 날아와 할미꽃을 피우고 있다. 할미꽃은 늘 할머니처럼 허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꽃수술을 볼 수가 없다. 물론 꽃을 세우면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쩐지 작위적이어서 멋쩍다. 왠지 불경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할미꽃은 할미꽃일 뿐 나이 드신 할머니는 아닌데도 말이다.

 며칠 전에 시제를 지냈다. 나는 시제를 지낼 때마다 지방과 축문을 써 가지고 간다. 지방과 축문에는 9대조부터 고조까지 할아버지 이름과 할머니의 성씨가 쓰여진다. 그런데 나는 묘한 버릇이 있다. 할아버지 이름보다 할머니의 성씨를 더 눈여겨보곤 하는 것이다. 가문을 지켜온 할머니들에 대한 고마운 감정 때문일 것이다.

 9대조 할머니는 광산 김씨, 8대조 할머니는 광산 이씨, 7대조 할머니는 순천 박씨, 6대조 할머니는 해주 최씨, 5대조 할머니는 김해 김씨, 고조할머니는 평강 채씨, 증조할머니는  보성 선씨, 할머니는 김해 김씨다. 어른들로부터 얘기를 들었거나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고조할머니부터다. 고조할머니는 평강 채씨로서 부잣집 딸이었으며 고조할아버지가 처가의 덕을 많이 보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여파였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도 고조할머니댁 마을이었다. 할머니 또한 부잣집 딸이었는데, 할머니의 친정 숫가락통은 1말들이 통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식솔들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할미꽃씨가 무슨 뜻을 가지고  날아와 이불재 연못가에 뿌리를 내렸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가끔 선조 할머니들이 어떤 분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할미꽃을 볼 때마다 할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애틋한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 *


 현관 앞에 핀 영산홍이 비에 젖어 더욱 붉다. 가랑비가 산자락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정읍에서 궁궐식으로 100평  규모의 전통한옥을 짓고 있는 김 도편수가 9시 45분쯤 이불재를 찾아왔다. 내가 수백(樹伯)이란 호를 지어준 도편수인데, 목수들은 비가 오면 일을 멈추고 쉬는 모양이다. 

 김 도편수처럼 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드문 편이다. 그는 수백이란 호를 받았으니 앞으로 수백 채의 집을 지을 것  같다고 좋아하며 회사 이름도 전통한옥 건축회사 '수백재'라고 바꾸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경복궁(홍례문, 근정전, 태원전), 덕수궁(중화전) 창덕궁(규장각) 등을 복원 및 보수 수리한 궁궐목수로서 한옥 짓는 자격이 누구보다도 탁월하고 충분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화엄사 운고각과 향일암 대웅전 복원공사를 한 김 도편수는 사찰 건축에도 전문성과 일가견이 있다고 믿는다.

 김 도편수의 말에 의하면 한옥은 정겨운 댓돌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댓돌에 놓인 신발을  보고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몇 사람이 있는지를 알게 되는데, 이는 정감이 없는 아파트의 출입 공간과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한다. 

 또한 한옥의 댓돌 위의 마루는 아파트의 현관과 달리 밖을 내다보는 큰 창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소나무와 연못이 바로 보이는 이불재 출입문 공간이 바로 창이나 다름없다. 김 도편수와 오전 내내 차담하고 도예수업을 끝낸 아내와 함께 능주로 나가 점심식사를  한 뒤 헤어졌다. 

 김 도편수가 지적한 대로 이불재부터 구석구석 한옥의 미(美)를 보완할 점은 없는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이란 단순히 잠만 자는 주거공간이 아니라 목수의 장인정신과 주인의 사유가 담긴 미학적인 공간일 것이라고 새삼 깨닫는다.


 * *


 비 오는 날인데도 광주 광륵사 인행스님과 법연스님께서  다녀가셨다. 예전에 두 분이 아주 작은 경차를 운전하고 오신 기억이 난다. 나는 그 경차만 보고서 소탈하고 무소유한 참스님이시라고 느꼈는데, 그때 인행스님이 한 말씀도 떠오른다. 왜 함부로 차를 바꾸냐며 여러 번 직접 수리해서 타고 다니는 차라고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경차는 경차인데 새차에다 조금 커진 듯하다. 두 분이 차에서 하차하시더니 바로 이불재 사립문으로 오신다. 나는 재빨리 나가서 스님들을 영접(?)했다.  

 차실로 들어와 1시간쯤 차담을 했다. 인행스님은 인터넷 불교언론인 <미디어붓다>를 경영하시는 분인데, 코로나 후유증에서 많이 벗어났으므로 예전처럼 글을 연재하시겠다고 한다. 기대가 된다. 경전에 근거한 과장이 없는 단박하고 진솔한 '스님 글'을 나는 좋아했던 것이다.

 법연스님도 휴대폰에 저장한 시(詩)들을 보여준다. 젊은 세대가 흥미롭게 접근할 만한 시들이다. 인행스님의 글이 이성적이라면 법연스님의 글은 감성적인 것 같다. 타고난 성품이나 취향이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인행스님이 MZ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며, 출가 전의 스승이신 고익진 박사가 우리말로 번역한 경전을 금과옥조처럼 항상 곁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불교계에 언어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문투의 고루한 언어는 젊은 세대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결국에는 외면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두 분 스님들과 주로 언어를 주제로 차담을 한 것 같다. 두 분 스님과 헤어지면서 나는 앞으로 출간될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을 들고 초파일 이후에, 이번에는 내가 광륵사를 찾아가 두 분 스님을 뵙기로 했다. 

 그러자 법연스님께서 "여기 이불재가 절 같고, 광륵사는 시장바닥입니다." 하고 웃으신다.  그러나 시장바닥의 절이야말로 중생과 함께 울고 웃는 절이 아닐까. 산중에 있다고 해서 부처님 뜻이 충만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을 터. 중생이 부처를 떠날 수는 있지만 '중생을 떠난 부처'는 상상할 수  없지 않은가.

 이불재 마당을 내려선 두 분 스님께서 내가 선물한 소설 <아소까대왕>이 비에 젖을까봐 가슴에 안고 사립문을 미신다. 비 오는 날 두 분 스님과 차담을 나눈 각별한 인연도 마음이 맑아지는 정복(淨福)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  *


 어제도 비가 왔고 오늘도 종일 장대비가 내린다. 봄가뭄이 완전히 해소될 것 같다. 새벽부터 오후 6시까지 출판사 다연에서 출간될 나의 일기 같은 산문집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 교정을 보았다. 편집이 매끄럽지 못해 교정을 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 편집이 궤도에 오르면 2교 교정은 빠르게 볼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은 표지 디자인이다. 출판사가 잘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는 정도껏 간여해야 한다. 작가가 과욕을 부리면 출판사 직원들이 의기소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대비가 하루 종일 내리다 보니 손님이 오지 않아서 교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논물을 대야 하는 농부가 아닌데도 후련하게 퍼붓는 비가 고맙다. 영산홍 꽃잎이 떨어져 제 둘레를 피딱지처럼 붉게 적시고 있다. 만두보다 더 큰 불두화는 비의 뭇매를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곤두박질할 것만 같다.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경담 2023-05-17 07:32:51
답변  
영산홍 비에 젖어 더욱 붉은데
도편수는 댓돌 위 마루에서 한가롭다네
불두화 장대비에 물구나무 설 듯 말 듯
두 동자승은 가슴에 경을 안고 사립으로 냅다 뛰는데
이불재 연못가 할머니꽃은
수면 위 동그라미 다시 반가워
화엄 2023-05-17 14:47:34
답변 삭제  
꽃이야기가 나오니, 고향 빈집에 홀로 피었다 지고 있는 수선화와 작약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무척이나 꽃을 좋아해 큰오빠께서 여러 종류의 꽃을 심어놓으셨지만, 고향집에서 머물지도 못하고 2년 전에 이생을 갑자기 하직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같은 존재, 오늘 더욱 오빠가 그립다.
비밀글

이름 패스워드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