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원왕생 원왕생 내리는 날에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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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구두도 생로병사가 있다. 10여 년 신고 다닌 구두를 이번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뒤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제 우연히 구두 밑창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닳은 밑창이 슬슬 벌어지고 있어 언제 구두 본체에서 떨어져 나갈지 몰랐다. 급히 문구점에서 순간접착제를 구입해 엉성한 실력으로 수선했다. 짐작이지만 이번 해외여행까지는 무사할 듯하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고마운 신발이 아닐 수 없다. 닳은 구두지만 변함없이 내 발을 편안하게 해주었으니 제 역할을 다해온 충절의 신발인 것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구두를 신으면 내 발과 하나 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비록 낡고 닳은 구두지만 내 신체 일부 같은 느낌이 드니 외출할 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꺼이 즐겨 신어 왔던 것이다. 아내와 딸이 제발 새 신발을 신으라고 말하지만 나는 어젯밤 순간접착제를 이용해 닳은 구두의 수명을 연장시켜 놓고 스스로 안도했으니 이 또한 낡은 내 구두에 대한 나의 애정표현이 아닐 수 없으리라.    

 다만, 수선할 때 너무 낡은 구두에 집착하여 순간접착제가 나의 검지와 엄지 끝마디에도 묻어 마치 코팅된 듯 불편하고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코팅된 순간접착제라고 하더라도 닳아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순간순간 주의집중하지 않으면 낭패를 본다는 사실을 또 깨닫는다. 집중하더라도 매사에 마음새김을 잘하고 살 일이다.

 * *

 꽃은 비바람에 피고, 비바람에 진다고 했다. 튀르기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이불재 초입의 자두나무꽃과 안마당 연못가의 벚꽃이 거친 봄비에 유명을 달리하듯 사라지고 없다. 허허롭기보다는 저버린 꽃에서도 열정이 느껴진다. 한순간에 약속이나 한 듯 비장하게 몸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닐 터. 가지 속에서 내년 봄을 기다리며 꿈꾸고 있겠지. 그렇다고 성급하게 가지를 부러뜨려 사라진 꽃을 보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거듭나는 환생은 맹렬하게 기다리며 꿈꾸는 자의 몫.

 피고 지는 진퇴(進退)의 순서에 따라 지금은 불단석 앞의 수선화가 만개해 있다. 또한 사립문 안쪽의 화단가에 영산홍이 선홍빛 노을처럼 붉디붉다. 수선화, 영산홍도 작약꽃과 모란이 필 때는 빛나는 자리를 내주고는 미련 없이 물러갈 것이다. 모란이 진 뒤 초파일이 가까워지면 갓난아기 머리만 한 불두화가 피어날 터이고,

 * *

 아침부터 보슬비가 오는 둥 마는 둥 내리고 있다. 튀르기예 이스탄불에 도착한 이튿날에도 우산을 접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홍기삼 동국대 전 총장님을 모신 우리 일행은 말마라해엽으로 나가 기도했다. 지도법사로 나선 쌍봉사 증현 주지스님이 목탁을 치며 발원했다.

 ‘저희 일행은 불기 2567년 대지진으로 인하여 비명횡사한 영가들의 영혼을 달래며 대자대비하신 제불보살님과 특히 아미타불의 가피로 다음 생에는 이러한 참혹한 일들을 겪지 않게 해주시고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주시옵고...(중략)

 그리고 저희 일행 모두에게 여행 도중 교통사고 및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없게 해주시고 서로가 협동하고 보살피며 하루하루 인연에 감사하며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는 참된 불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거듭거듭 두 손 모아 합장하고 발원하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이러한 기도 덕분인지 여행은 순조로웠다. 우리가 하루 전에 통과한 고원지역에서 갑자기 폭설이 내려 대형 추돌사고가 났지만 우리는 이미 그곳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지진의 여진이 급습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났던 튀르기예 동부지역은 여행 내내 조용했다. 따라서 일행 모두는 튀르기예 7천년 역사와 문화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일행 모두가 스님의 내공으로 돌렸다. 특히 일주일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처음에 도착했던 이스탄불 공항으로 되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스님의 마지막 회향법문은 종교가 다른 일행분들을 감동시켰다. 스님은 초기경전 <숫따니빠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시조창을 하듯 읊조렸던 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기독교 신자인 한 분께서 불경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며 몹시 감탄했다. 불자들에게는 귀에 익은 구절이지만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영혼의 시처럼 마음을 격동시켰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비명횡사한 망자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 형제국이라는 튀르기예 사람들과 산하대지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늦게야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다. 이불재 연못에 동글동글한 파문이 일고 있다. 빗방울이 마치 구천에서 떠도는 고혼들을 천도하듯 원왕생 원왕생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