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蓮이를 위하여

우봉규 장편소설. 『蓮이를 위하여』

우 봉규 | | 2023-04-11 (화) 08:37

蓮이를 위하여 23 



크게보기 

(©장명확) 



박 서방은 아내의 불안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에 희색을 띠면서 부리나케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에선 그 누구도 좀 모자라는 박 서방을 찾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안으로 가슴 조이던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의외로 박 서방은 일찍 돌아왔다. 뿐만이 아니었다. 박 서방은 연신 함박웃음이었다.

“좋은 일이 생겼어. 흐흐흐!”

“무슨 일로 오라고 했어요?”

그녀는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안집에서 나더러 제주도에 다녀오라고 하더군.”

“제주도?”

“얼마 안 걸린데.”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와 남편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닥쳐온 것을 직감했다. 양반집 아들의 얼굴만 생각하면 그녀는 안절부절 일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가슴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곳은 반년이 지나도 못 돌아와요. 우리가 사는 육지가 아니고, 바다로 꽉 막힌 섬이에요. 가면 안 돼요.”

그러나 박 서방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육지나 섬이라는 말은 박 서방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박 서방은 제주도가 어디 있는지, 또 어떤 곳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양반집에서 특별히 그에게만 심부름을 시켜주는 그것만으로도 감격하고 있었다. 

“험하기로 이름난 고을이에요. 더구나 사나운 파도를 만나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 서방은 웃고 있었다.

“허허! 공연한 걱정, 이미 철석같이 약조를 했는걸.”

박 서방은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다.

“거기에는 왜 갔다 오래요?”

그녀는 애가 닳았다.

“그곳에도 안집의 토지가 있는 모양이야. 나더러 제주도의 그 땅을 처분해 가지고 오라더군. 아마 안댁 마님께서 나를 퍽 신임하고 계신 모양이야. 그러기에 그런 일을 맡기지. 그곳에 다녀오면 돈푼이나 두둑이 줄 모양이야. 흐흐. 청리산의 이 산밭뿐만이 아니라 저 아랫녘의 물 좋은 땅을 부치라고도 그랬다니까. 흐흐!”

그러나 그녀의 눈은 점점 초점을 잃고 있었다. 모자라는 남편에게 그런 일을 시킬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그 먼 제주도에 땅이 있다는 말 자체가 거짓인 것이다. 그녀는 양반집 아들의 그 수상했던 눈빛이 다시금 떠올랐다. 무언가 흉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흉계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누가 그러던 가요?”

“큰 도련님이.”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면 큰일 난다고 했어.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하자고.”

“그래, 곧 떠나겠다고 했어요?”

“아암, 큰 도련님이 직접 나한테 그렇게 말했는걸.”

“가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 사람 믿을 수가 없어요. 모두 거짓이에요. 당장 내가 안집에 가봐야겠어요.”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내가 아무리 못나도 사내대장분데 밖의 일을 색시한테 일렀다고 모두 놀릴 거야. 그리고 이번 일은 큰 도련님과 나만의 일이야. 색시는 모르지만 큰 도련님이 그곳 관리로 오래 있었다잖아. 그때 그곳에 토지를 장만한 모양이지. 이번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우린 끝장이야. 우리 마을에서 안집 건드렸다간 살아남지 못해.”

“이건 안집 일이 아니에요. 그 큰 도련님이라는 사람의 술수라구요.”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을 감추며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큰 도련님이 내게 술수를 꾸밀 까닭이 없잖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기를 갖더니 색시 마음이 약해진 것 같아.”

박 서방은 제법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정말 남편 말대로 뱃속에 아기를 갖고부터 자신이 너무 예민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양반집 아들의 음흉한 눈길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못해요. 제발!”

그녀는 속 시원히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그저 박 서방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무슨 소리, 지금 내가 가지 않는다고 하면 그나마 몇 마지기 있는 산 밭뙈기도 다른 사람한테 줄 판인데……, 그러면 우리는 굶어 죽어.”

우직한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러면 돌아오실 날이 언제쯤일까요?”

“내년 농사가 시작될 즈음이면 돌아올 수 있겠지. 몇 달 걸리겠지만 너무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뒷일은 안집에서 다 돌보아줄 거요.” 

박 서방은 걱정하는 아내를 위로했다. 드디어 박 서방이 떠날 날이 왔다. 박 서방은 이별을 슬퍼하는 그녀를 달래서 안심시키고 길을 떠났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잘 다녀오라고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그리고 청리산 언덕에 올라가 박 서방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어쩐지 남편 박 서방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워질 때쯤 그녀가 청리산 언덕에서 집에 돌아오자, 양반집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제야 올 것이 왔구나!” 그러나 그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뒷일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염려할 것 없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모든 걸 내게 상의하게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점잖게 어두운 마을로 내려갔다. 안심이었다. 그녀는 혹시 자기의 의심이 지나쳐 선량한 양반집 아들을 공연히 의심한 것은 아닌지, 자기 자신을 책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박 서방이 떠난 뒤로 양반집 아들은 이틀 걸러 한 번씩 꼭 그녀를 찾아왔다.

“양식은 넉넉하오?”

“뭐 필요한 것은 없소?”

그는 때로는 쌀말도 보태주고, 돈냥도 보태주며 살림 걱정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전과 다르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해 주는 그의 호의를 일방적으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내가 박 서방을 멀리 심부름 보냈으니, 그 뒷일은 내가 감당해야 도리가 아니겠소.”

그는 산으로 사냥을 가지도 않으면서, 사냥복 차림으로 혼자 그녀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러는 동안에 이럭저럭 시간이 흘러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이가 돌아오겠지.” 그녀는 날이면 날마다 청리산 꼭대기에 올라가 멀리 청리 쪽 갑장산를 쳐다보면서 언제쯤 남편이 돌아올까 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삼월이 지나고, 사월이 지나도, 떠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배는 자꾸만 불러오는데……. “어찌 된 일일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녀의 걱정은 날이 갈수록 커 갔다. 그래서 그녀는 양반집 아들이 올 적마다 물어보았다. 그 사이 훌쩍 봄이 가고 여름이 갔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봄에 온다던 이가 여태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요? 지금쯤이면 올 때가 훨씬 지났는데…….”

“오늘내일 간 무슨 소식이 있을 거요. 아마 그곳 일이 복잡하여 좀 늦어지는가 본 데. 아무 걱정 말고 아기 낳을 생각만 하시오.”

양반집 아들은 근심하여 묻는 그녀에게 언제나 그렇게 위로해 주었다. 그녀는 밥만 먹으면 청리산으로 올라가 남편 박 서방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한번 떠나간 남편 박 서방은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기는커녕 소식 한 장이 없었다. 그녀는 점점 불길한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양반집 아들이 집에 오더니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박 서방의 소식을 알긴 했는데…….”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때 이미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될 수 있으면 태연하게 말했다.

“소식을 들으셨어요? 그래, 언제 오신 데요?”

“소식을 듣긴 했으나 아주 불길한 소식이라네.”

“불길한 소식이라구요? 어떤 일인데요? 혹시 그이가 병이라도 나셨나요?”

양반집 아들도 얼른 말이 나오지 않는지, 잠깐 동안 주저주저하다가 마침내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한숨을 내어 쉬며 입을 열었다.(계속)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비밀글

이름 패스워드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