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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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못 위의 청리산 아랫녘은 모두 과수원이 되었지만, 전설에 의하면 청리산 기슭에 외따로 떨어진 한 채의 초라한 삼간초가가 서 있었다. 거기에는 박 서방이라고 부르는 젊은 농군이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전설이 으레 그렇듯 박 서방은 마음은 착했으나 좀 어리석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바보 박 서방이라고 불렀다. 그는 누가 놀리거나 욕을 해도 화를 낼 줄 몰랐다. 우직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늑대 아내를 만난 건 한겨울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박 서방은 청리산으로 나무를 하러 집을 나섰다. 깊숙이 산속으로 들어간 그는 나뭇짐을 내려놓고 갈퀴를 들었다. 그리고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긁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낙엽을 긁어내리는데 뒤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장옷으로 가린 아낙네였다. 박 서방은 일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낙네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긴 옷으로 몸을 가렸지만 박 서방이 보기에도 너무 아리따운 아낙네였던 것이다. 이 깊은 산중에 외관으로도 젊어 보이는 아낙네가 혼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방 50 리 근처에는 인가가 없었던 것이다. 박 서방은 아낙네에게 한마디 말을 붙여보지도 못하고, 얼른 나뭇짐을 지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데 더더욱 이상한 것은 그 아낙네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다. 등짝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마당에 나뭇짐을 내려놓았을 때는 이미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도대체 누군데?”

그제야 그는 얼어붙은 입을 떼었다. 

“갈 곳이 없습니다.”

그녀는 대뜸 마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엄동설한, 차가운 겨울바람이 마당을 휩쓸고 지나갔다. 사방은 먹물을 뿌린 듯 어둡고 고요했다. 칠흑 같은 밤이다. 하늘에 달과 별이 단 하나도 걸리지 않은 그믐밤, 수상하기는 하지만 아낙네를 밖으로 내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나가서 온종일 일한 다음, 저녁 늦게 돌아와 호롱불을 켜놓고 그날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들은 날이 새는 줄도, 날이 지는 줄도 모르는 행복한 세월을 보낸다. 비록 가난하지만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박 서방의 아내가 된 늑대 여인은 정말, 아주 정말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옳았었나를 실감하고 있었다. 따뜻한 불빛, 서로의 몸을 비비대며 나누는 그날 그날의 이야기, 햇빛을 보면 햇빛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낙엽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발톱과 이빨이 지배하지 않는 곳, 말과 글이 우선하는 유일한 집단,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한 이부자리에서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 즐거움,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웃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여인으로 살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죽어가야지.” 하던 그녀의 소원은 모두 이루어진 셈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뱃속엔 겨울이 지나고 봄여름이 가면 태어날 그들의 아기가 들어 있었다. 이제 그렇게 몇 달만 지나면 자신의 예쁜 인간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발을 딛고 있는 인간의 땅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여인으로 살다가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죽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박 서방은 지주인 아랫마을 양반집에 다녀가라는 전갈을 받았다. 무슨 일일까? 전에 없던 일이었다. 속없는 박 서방은 좋아했지만, 그녀는 몹시 불안했다. 며칠 전 사냥을 나왔다가 박 서방의 집을 들른 양반집 아들의 수상한 눈길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은근하게 쳐다보던 양반집 아들의 눈초리가 그녀의 머리에서 영 떠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박 서방은 나무하러 산으로 가고 없었다. 양반집 아들은 목 부근에 화살이 박힌 큼지막한 늑대를 하인의 어깨에 걸치고 당당하게 그들 초가로 왔었다.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인기척에 바깥으로 나온 그녀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그 늑대는 그의 반려자 ‘어둠의 무리’ 부두목인 수늑대였던 것이다. 아마도 마을로 내려간 그녀를 찾기 위해 인간 마을 근처를 배회하다가 화살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당부했거늘. 그녀는 얼른 수늑대의 시선을 외면했다. 수늑대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멍한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슬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밀물져 왔다. 그 자리에서 당장 양반집 아들을 뜯어먹고 싶었다. 양반집 아들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을 악물었다. 수늑대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족류로 그녀를 알아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수늑대가 천천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일시에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기 위해, 일시에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감추기 위해, 그녀는 어금니를 맞물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자꾸만 떨리는 손발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사지를 떨고 있었다. 

“왜, 불쌍한가?”

양반집의 아들이 히죽거리며 그렇게 물었을 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늑대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파도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으로 삼켰다. 숨을 골랐다.

“하필이면 면상에 흉터가 있는 놈을, 게다가 또 한쪽 다리는 절어요. 빌어먹을! 성한 놈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가죽을 벗길 때 까진 목숨은 살려야지. 그래야 좋은 털옷이 나오지. 흐흐흐!”

“안 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다. 핏발 선 그녀의 눈은 양반집 아들을 집어삼킬 듯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 분노의 눈빛을 눈물이 덮었다. 그녀의 눈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햇빛에 부서졌다. 양반집 아들과 하인이 그녀의 갑작스런 외침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죽어 가는 수늑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수늑대가 힘겹게 눈을 뜬다. 그녀를 바라보는 수늑대의 망연한 눈빛, 간절한 호소,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수늑대를 자신의 가슴으로 감싸 안았다.

“허, 참!”

양반집 아들이 그녀의 등 뒤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늑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별 이상한 아낙도 다 있군. 서방이 이상하니까 자네도 정상이 아니구먼. 그렇지만 아낙네로서는 만점이야. 흐흐! 그 갸륵한 마음씨를 사서 늑대는 자네에게 줌세. 죽이든 살리든 자네 마음대로 해. 빌어먹을 다른 놈들은 다 놓쳤지 뭐야.”

양반집 아들은 자신의 너그러움에 스스로 대견한 듯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의 자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깊은 산중에 이런 인물을 가지고 있는 아낙네가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그렇지만 조건이 있네. 내가 이 산에서 사냥을 할 때는 항시 자네 집 신세를 져도 되겠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엾은 수늑대를 살릴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얼른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고, 수늑대의 목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그것 또한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럼, 난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네.”

마치 얼이 빠진 듯 수늑대를 간호하는 그녀의 모습, 그 정신 나간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양반집의 아들은 아주 이상하지만 흡족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마을로 내려갔던 것이다. 양반집 아들이 마을로 내려가기가 무섭게 그녀는 죽어가는 수늑대의 상처를 돌보았다. 깊숙한 상처를 입긴 하였지만 그나마 많은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은 천행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산 약초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하여 구해놓은 약초를 찧어 상처 난 수늑대의 목에다가 찜질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늑대는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눈을 크게 뜰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늑대의 눈을 외면했다. 안타까움, 쑥스러움, 민망함, 그리고 처참함. 그녀는 수늑대를 부엌 옆 헛간으로 옮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점차적으로 수늑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조금만 그렇게 있으면 다시 소굴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늑대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인간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는 늑대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

다음날, 그녀의 결연한 마음을 알았는지 헛간의 수늑대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로서는 가슴이 아팠지만, 박 서방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이후 그녀는 화살이 목에 박힌 수늑대와 양반집 아들의 눈초리와 맞닥뜨리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박 서방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 죄진 것도 없이……. 늑대가 아니고,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입을 가지고도 말할 수 없는 슬픔, 그로부터 그녀는 어렴풋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쓸쓸함에 눈뜨기 시작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