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할지언정 고립되지 말라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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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중'이란 패(牌)는 이곳 이양면에 사는 경헌(慶軒) 최동기 선생이 내게 선물한 것이다. 또 패 위에 얹힌 붉은 방울은 은강(隱江) 이남섭 시인이 북인도 라다크에 여행 갔을 때 내게 사준 선물이다. 오전에는 손님을 맞지 않는데 어느 날 어떤 분이 그런 줄 모르고 왔다가 사립문을 열어주지 않자, 되돌아가면서 말했다. 

“이 집 주인의 성은 '집'씨이고, 이름은 '필중'인가 보다.”

이처럼 호적에 없는 문패 역할도 하는데, 나는 불만이 없다. 스스로 정한 규칙이 내 삶의 질서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머릿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겨우내 사립문 기둥을 붙들고 있는 담쟁이가 푸르다. 삭풍 매서운 겨울 동안 사립문 기둥을 붙들고 있는 담쟁이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엄동설한에 살고자 애쓰는 생명 중에 담쟁이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오늘은 담쟁이가 나에게 어서 의자에 앉아 글을 쓰라고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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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산방 이불재는 화순군과 보성군 사이 계당산 산자락에 있다. 그러니까 어느 군에서 대설주의보를 내리든지 다 해당되는 산중인 것이다. 아침에 잠깐 쌓인 눈을 쓸려고 보니 싸리비가 없다. 산방을 한 바퀴 돌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무삽처럼 생긴 눈가래로 치울 폭설은 아니다. 할 수 없이 툇마루나 부엌을 쓰는 수수비를 사용했더니 개운치가 않다. 

눈은 싸리비로 마당을 후벼 파듯 쓸어야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산을 오르려면 산봉우리까지, 바다에 가려면 바다 밑까지 내려가라는 선가(禪家)의 금언이 문득 생각난다. 정진을 하려면 마음이 시원해질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하라는 뜻일 터. 

다음 장날에는 반드시 싸리비를 한 자루 사야겠다. 꽃샘추위가 한 번은 올 것이고, 청매화 꽃이 피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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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항아리 소래기 위에 쌓인 눈(雪)의 키가 점점 자라고 있다. 얼마나 쌓이는지 가끔 눈(目)이 간다. 

지금 내리고 있는 눈은 쌀가루 같은 가루눈이다. 잘고 얌전하게 내리는 가랑눈이나 가늘고 성글게 내리는 포슬눈과 흡사한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소낙눈이나 큰 눈송이들이 흩날리듯 내리는 함박눈과는 다르다. 드러나지 않게 시나브로 오솔길을 지워버리는 눈이 가랑눈이나 가루눈, 포슬눈인 것이다. 

가루눈이 산방 이불재 마당에 자꾸 쌓인다. 옛 선사는 수행하던 띳집 툇마루에 쌓인 눈을 보석 같다고 말했지만 나는 자꾸 비질을 하고 있다. 얼마나 고독했으면 눈을 보고 보석이라고 했을까? 불가(佛家) 스승이신 생전의 법정 스님께서는 고독할지언정 고립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씀의 뜻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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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칠십 세 안팎인 분들인데 대구에서 김종명 선생, 익산에서 소재선 선생이 왔다. 두 분은 서울대 동기로서 자취생활도 함께 했다고 얘기한다. 김 선생은 내 장편소설 <시간이 없다>를 읽다가 첫 장에 나오는 미국인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간화선 체험기를 발견하고는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자신이 미국에서 한국불교를 연구하면서 버스웰 교수의 한국인으로서는 첫 제자였다고 밝힌다. 

또 한 분 소 선생은 친구 따라온 셈인데, 직장생활 정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익산 사자암이 있는 마을에서 이장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배운 대금을 요긴하게 즐기고 있다며 이불재 마당에서 '정선아리랑'을 한 곡 연주한다.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유쾌한 차담을 나눈바, 그 여운이 오래갈 것 같다. 

어젯밤까지 장편소설 <아소까대왕>(전 3권) 교정을 아내와 함께 다 보았기 때문인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두 분을 접빈했던 것 같다. 교정을 다 보지 못했다면 홀가분하지도, 유쾌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문득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화엄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렇다. 마음이란 그림자가 어디서 어른대는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잘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