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3-03-04 (토) 07:44야자는 열대지방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식물이다. 하늘빛 바닷가를 배경으로 해안가 모래사장에 가로수처럼 줄지어 서 있는 야자나무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따뜻한 남쪽나라 휴향지의 스테레오타입 그 자체이다. 야자나무는 대부분 열대권 지방에 서식한다. 종려과 혹은 야자과에 속하는 식물로 외떡잎식물이고, 큰키나무 또는 떨기나무에 속한다.
야자나무는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도 자란다. 제주공항을 나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야자나무이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야자수로 인해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키 큰 야자수는 서귀포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졌지만, 지구온난화 여파로 최근에는 식생 한계선이 북상하여 곧 남부지방에서도 재배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몇 해 전부터는 야자나무로 깎은 불보살상이 불구상점에 등장해 또 다른 친근감을 주기도 한다.
야자나무 역시 비유의 왕인 붓다의 설법에 등장한다. 이 설법은 야자나무로 강을 건너는 것과 관련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앙굿따라니까야> 제4권 큰 법문의 품 ‘쌀하의 경(Sāḷhasutta)’이이다.
붓다가 웨살리 시의 마하바나 숲에 있는 꾸따가라쌀라 강당에 계실 때, 릿차위 족 쌀하(Sāḷho)와 아바야(Abhayo)가 찾아와 인사를 드린 후 질문을 던진 일이 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거센 흐름을 건너는 가르침을 시설합니다. 계행에 의한 청정을 통하는 것과 고행에 의한 금욕을 통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붓다는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거센 흐름을 벗어나는 길을 묻는 이 물음에 대해 계행에 의한 청정은 이교도들과 공통적인 요소이지만, 고행에 의한 금욕으로는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다고 명쾌하게 답한다. 이어 붓다는 두 릿차위 족을 위해 야자나무를 예로 들어 자세히 설명한다. 예컨대 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이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숲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크고 곧고 싱싱한 야자나무(mahatiṃ sālalaṭṭhiṃ ujuṃ navaṃ akukkukajātaṃ)’를 찾아 뿌리와 꼭대기를 자르고, 잔가지와 잎사귀를 깨끗이 제거하고, 도끼로 껍질을 벗기고, 까뀌(나무 깎는 연장들 가운데 하나)로 껍질을 벗기고, 대패로 다듬은 뒤에 모래돌로 문지르고 강으로 가져간다면 강을 건널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쌀하는, ‘그 야자나무는 겉으로는 잘 다듬어졌지만 안으로는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야자나무의 줄기는 가라앉을 것이고, 사람은 재앙을 자초하여 죽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쌀하의 답변을 들은 붓다는 이렇게 설한다.
“쌀하여, 이와 마찬가지로 고행에 의한 금욕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고행에 의한 금욕을 핵심으로 삼고, 고행에 의한 금욕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거센 흐름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쌀하여, 신체적으로 청정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청정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정신적으로 청정하지 못한 행위를 하면, 앎과 봄을 통해서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이어 붓다는 고행에 의한 금욕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고행에 의한 금욕을 핵심으로 삼지 않고, 고행에 의한 금욕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않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거센 흐름을 건널 수가 있으며, 신체적으로 청정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청정한 행위를 하면 앎과 봄을 통해서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시 한번 야자나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이 크고 곧고 싱싱하고 단단한 야자나무를 발견하고, 그 나무의 뿌리와 꼭대기를 자르고, 잔가지와 잎사귀를 깨끗이 제거하고, 도끼로 껍질을 벗기고, 까뀌로 껍질을 벗기고, 끌로 안쪽을 파내고, 끌로 안쪽을 파낸 뒤에 대패로 다듬고, 모래돌로 문지른 뒤 배로 만들고 노와 키를 묶어 강으로 가져간다면 그 사람은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를 쌀하에게 물었다. 붓다의 물음에 쌀하는 ‘건널 수 있다’며, 그 까닭은 그 야자나무가 겉으로는 잘 다듬어졌고 안으로도 잘 다듬어졌고, 더구나 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사람은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널 것이라고 답한다. 쌀하의 대답을 들은 붓다는 이렇게 설한다.
“쌀하여, 이와 마찬가지로 고행에 의한 금욕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고행에 의한 금욕을 핵심으로 삼지 않고 고행에 의한 금욕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않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거센 흐름을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쌀하여, 신체적으로 청정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청정한 행위를 하고, 정신적으로 청정한 행위를 하면 앎과 봄을 통해서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전재성 옮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인용
붓다가 이 경에서 비유로 거론한 야자나무는 크고 곧고 싱싱하고 단단하다. 야자나무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이 경에 등장한 야자나무는 키 큰 대추나무과에 속하는 야자나무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경에서 거센 흐름은 ‘존재를 존재의 영역에 가라앉게 하고, 보다 높은 상태나 열반으로 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윤회의 고해에 머물게 하고, 윤회의 고해를 벗어나는 열반을 방해하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거센 흐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거센 흐름[欲流], 존재의 거센 흐름[有流], 견해의 거센 흐름[見流], 무지의 거센 흐름[無明流]이 그것이다.
<쿳다까니까야> 이띠붓따까-여시어경의 ‘내적인 티끌의 경(Antaramalasutta)’에도 붓다가 야자를 비유로 들어 설법한 게송이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세 가지 내적인 티끌, 내적인 적대자, 내적인 필적자, 내적인 살해자, 내적인 반대자에 대해 수행승들에게 설법한다. 붓다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내적인 티끌이고, 내적인 적대자이며, 내적인 필적자이고, 내적인 살해자이며, 태적인 반대자라고 설파한다. 이렇게 의취(意趣)를 설한 붓다는 관련하여 게송을 읊는데, 야자는 성냄과 관련된 게송에 등장한다.
성내는 자는 유익을 알지 못하고
성내는 자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성냄이 사람을 정복하면
맹목의 어둠이 생겨난다.
성냄을 버리고
성내게 하는 것에 탐착하지 않으면,
그것으로써 성냄은 버려진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야자처럼.
-전재성 옮김 <이띠붓따까-여시여경>
이 글을 읽은 분들이 열대 휴양지의 멋진 야자나무를 보거나 야자열매를 발견하면, 아련한 감상에 빠지지 말고, 고행의 금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삿됨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또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성냄에 탐착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