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마침내 시가 된다면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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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한상원 회장 별장이자, 홍인학원 영산중고등학교 영빈관인 홍인재(弘人齋)에서 저녁을 하고 내 산방으로 캄캄한 밤에 아내와 함께 돌아왔다. 월헌 김천국 선생이 길 안내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홍인재는 단독가옥으로서 한강 이남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한옥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기둥이 15자쯤 되는 것 같다. 보통 한옥의 기둥이 6자에서 8자 사이이니 대궐에서나 볼 수 있는 장대한 크기였다. 한상원 회장의 호는 내가 지어주었다. 수년 전 한 회장이 내 산방으로 찾아와서 "기업을 해서 작으나마 성공했으니 이제는 학교를 인수해 육영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저의 꿈에 합당한 호를 부탁합니다." 하기에 나는 적잖이 궁리했다. 

3일 뒤, 새벽이었을 것이다. 문득 한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홍익인간'에서 홍(弘)자와 인(人)자를 가져와 홍인(弘人)으로 짓자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즉 홍익인간은 단군의 건국이념인데 달리 말하면 단군의 교육이념이 아닐까. 종교적으로는 '자비의 세계화(饒益衆生)' 혹은 '사랑의 세계화(그리스도 계명 실천)'란 생각이 든다. 홍익인간이란 네 글자가 종교를 초월해버리는 얼마나 고원하고 웅장하고 인류애적인 말인지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회장에게 전화로 '홍인'으로 작호(作號)했다고 알려주었더니 아주 만족해했다.

이후 보름쯤 지난 뒤 한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호를 받고 제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나주시에 있는 영산중고등학교를 인수하게 됐습니다."

어제 들은 이야기다. 올해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입 성적은 기대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 회장이 학교에 4년 동안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며 교장, 교사,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진심을 다한 결과 지방 명문학교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녁 자리에 합석한 홍인재 부근의 마을 유지들에게 음식이 앞에 있었으므로 2분 발언을 요청해 한 회장을 짧게 소개했다.

"한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두 마디를 기억합니다. 첫 마디는 기업을 해서 가족만을 위한다면 짐승이나 다름없지요,였습니다. 두번째 마디는 저는 치료비가 없어 입원을 못하는 이 사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개인적인 인연도 소개했다.

"제가 518항쟁 소설 <광주아리랑>(전2권)을 집필할 때 한 회장께서는 좌장을 자청해서 뜻있는 기업인들을 모아 저를 돕기도 한 역사의식이 강한 분입니다."

그러자 마을 유지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을 가운데 자리한, 작고한 본래 주인의 자식한테서 격조 있는 한옥 몇 채가 어느 졸부의 손에 넘어가나 하고 상실감이 들어 경계했다가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비록 주인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을의 자존심 같은 상징이랄까, 어린 시절부터 자긍심을 주는 집이었기 때문일 터였다.

* *

계간지 <동화향기, 동시향기>에 다음과 같은 권두언을 보냈는데, 이제야 책이 왔군요. 마침내 ‘무엇이든 마침내 시가 된다면’이라는 저의 글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이 책의 공간에 옮겨 둡니다.

 무서리가 내린 날 아침입니다. 된하늬바람이 선득하게 불어오는군요. 이때 사립문 너머로 나가 조금만 산책을 해도 심신이 개운해집니다. 여물어진 계곡물소리와 이마를 스치는 찬바람 덕분입니다. 

 요즘에는 머리를 맑혀주는 것이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제 산방의 마당가에 핀 차나무의 차꽃과 노란 산국의 향기입니다. 향기는 굳이 냄새 맡는 짐승처럼 코를 킁킁대지 않아도 됩니다. 공기처럼 가까이 다가와 제 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사람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꽃향기는 제 철이 지나면 다른 꽃향기로 바뀌지만 사람의 향기는 계절과 상관없이 오래갑니다. 저는 의자와 친하게 지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날마다 의자와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는 작가이지요. 

 여러분은 의자를 선물 받아 보았는지요? 저는 지인에게서 오래된 주목나무로 만든 의자를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의자에 앉으면 주목나무의 향기도 납니다만 그보다는 지인의 정성과 향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지요. 의자에 앉을 때마다 목수처럼 톱과 끌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지인의 수고와 심성을 짐작하지요. 지인의 향기는 의자와 함께 오래오래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향기 못지않은 것이 또 있는 듯합니다. 바로 글의 향기입니다. 저의 경우, 젊은 날에는 시를 읽고 마음이 먹먹했던 때가 많았지요. 그래서 시 같은 동화나 소설을 써보겠다고 소망했었지요. 어디 글만 그러하겠습니까? 어느 날 제 산방을 찾아온 원로 사진작가에게 “무슨 사진을 찍고 싶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시가 되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마침내 시가 된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또 하나의 향기로 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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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갇힌 듯한 이웃 절 쌍봉사가 더 포근하게 보인다. 내가 이 산중에 산방 이불재를 짓고 들어온 이유 중에 하나는 화순 쌍봉사가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마흔아홉 때 샘터사 직장에서 간부사원으로 생계 걱정 없이 살 것인지, 아니면 낙향하여 글만 쓰는 온전한 작가로 여생을 보낼 것인지 나에게 질문을 던진 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화순 쌍봉사였던 것이다. 

대학시절 방학 때나 반독재투쟁데모 등의 이유로 장기 휴강이 되면 종종 쌍봉사로 내려와 소설 습작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연만으로도 쌍봉사는 내게는 고향 집 같은 절,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설 습작을 할 수 있는 분위기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도 오만상을 한 채 웃을 줄 모르는 나에게 대웅전의 부처님 미소가 불심(佛心)을 키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쌍봉 마을은 내 고조부께서 살던 마을이어서 그 인연도 간접적이었다. 16대조 할아버지가 과거급제하여 고향 하동에서 흥양(고흥) 현감으로 부임해 왔고, 그런 사연으로 15대조 할아버지는 화순 입향조가 되었음이다. 15대조 정여해 할아버지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서 화순의 은둔 도학자였다. 매월당 김시습이 찾아와 할아버지 사랑방에 머물며 서로 주고받은 시문들이 할아버지 돈재문집(遯齋文集)에 실려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쌍봉사가 정유재란 때 전소하여 이후 복원 중창을 어렵게 거듭했는데, 그때 화순의 하동정씨 문중에서 보시했다는 기록이 1690년경에 편찬한 문중 족보에 나오는 것을 보면 쌍봉사와 나와의 실타래 같은 인연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내는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서 개인도예전을 마치고 주지스님께 대나무가 붉게 그려진 듯한 도자기를 선물했고, 나는 디자인이 고풍스러운 받침대를 인사동 연화정에서 구입해 기쁜 마음으로 보시했다.

육바라밀이란 인격완성의 지름길인 여섯 개의 징검다리일 것이다. 육바라밀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중에서 보시가 왜 맨 앞에 있을까? 내 나름대로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스스로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음이건 물건이건 간에 무엇을 주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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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41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점심때 능주로 나가 가끔 손님들에게 권하는 뜨거운 음식으로 외식을 했다. 그런 뒤, 이불재 오는 길 건너편에 있는 몽리브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다섯 명의 풋풋한 청년들이 차를 마시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오늘이 결혼 41주년입니다. 사진  좀 찍어 주시겠습니까?" 하고 겸연쩍게 부탁하자, 모두 놀란 얼굴로 박수를 치더니 한 청년이 기쁘게 응해준다. 

참고로 '몽리브(Mon  Livre)란 프랑스어로 '내 책'이란 뜻인데, 이곳 서가에도 내 장편소설 민음사판 <산은 산 물은 물>이 꽂혀 있어 주인이 어떤 분인지 문득 궁금해했던 적이 있는데, 인연이 없는지 아직까지 만나지는 못했다.

반세기가 가까워지는 41주년, 아내는 고행(苦行)의 시간이었다고 농담한다. 갑자기 아내의 농담이 의미심장해진다. 내 삶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 만약 우리 부부가 출가 수행자로서 41년 고행 정진했다면 아마도 득도(得道)하여 고승의 반열에 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 부부는 아직도 미망에 끄달려 사는 중생의 신산한 울타리 안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가와 출가의 삶을 비교해 보니 행복지수의 저울추가 어디로 기울지 도무지 모르겠다. 순간순간 고행(苦行)과 고행(高幸) 쪽을 간단없이 기울 것 같으니 그렇다. 입적하신 숭산 선사께서 여러 눈푸른 벽안(碧眼)의 서양 젊은이들을 불문에 들게 한, 활구(活口)의 화두와 같이 '오직 모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