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요계는 트로트가 대세인 듯싶다. 여러 방송사에서 트로트 경연프로그램이 봇물처럼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 가수 진성 씨가 ‘보릿고개’라는 노래를 부르는 구성지게 부르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구성진 노래만큼이나 가사들도 어렵던 시절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보릿고개는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의 상징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이야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면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물론 8 ·15광복 후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보릿고개는 연례행사처럼 찾아들던 농촌의 빈곤상(貧困相)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보릿고개는 지난 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올해 농사지은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경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운 시기를 의미한다. 일제의 식량 수탈과 6.25 전쟁으로 인해 당시의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 속에 살아야 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빚·이자·세금 등 여러 종류의 비용을 뗀 다음, 남은 식량으로 초여름 보리 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때는 대개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거나, 걸식과 빚으로 연명했으며,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속어는 이 시기 거친 먹거리로 인해 생겨난 불가피하게 생겨난 병이었다. 실제로 거친 음식이 완전하게 소화되지 못한 채변으로 배출되면서 항문 주위의 피부가 터져 피가 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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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이 작물은 먹을 것이 없는 최악의 시기에 생명을 지켜주는 운명을 타고난 식물인 듯하다. 불전(佛典)에도 보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지 12년째 되는 해, 붓다는 사왓티를 방문해 붓다의 설법을 듣고 감동한 웨란자(Verañjā)의 브라만 왕 악기닷따(Aggidatta)의 초청받았다. 

“세존이시여, 세존과 비구들께서는 부디 다음 우기에 저희 웨란자로 오셔서 안거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붓다와 비구들은 안거 시기가 다가오자 오백 비구와 함께 웨란자로 갔으나, 악기닷따 왕은 궁전의 문을 닫아걸고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안거 동안의 지원을 약속한 악기닷따의 황당한 행동에 난감해진 붓다와 비구들은 걸식에 나섰으나, 붓다의 명성조차 생소했던 이 지역에서 걸식으로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구나 이 시기 웨란자 지역은 기근과 풍토병이 돌아 탁발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목갈라나가 신통으로 땅을 갈아엎어 음식을 마련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가서 음식을 마련해 오겠다고 청했지만, 붓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과보가 익어 떨어지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때마침 와라나시에서 말을 키우는 사람들이 넓은 목초지를 찾아 웨란자에 왔는데, 탁발을 못해 빈 바리때를 들고 마을에서 나오는 비구들을 보고 사정을 물었다. 붓다와 비구들이 처한 곤혹스런 사정을 들은 그들이 말했다. 

“사정이 몹시 딱하긴 하지만 어쩌죠. 저희도 가진 양식이 거의 떨어졌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사료용 겉보리뿐인데 이거라도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맙기는 하지만 말이 먹을 사료를 저희에게 주시면 저 말들은 무엇을 먹고살겠는지요? 말을 굶주리게 하면서까지 보리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마침 풀들이 잘 자라 말들을 먹이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가져온 겉보리의 반을 덜어 비구들에게 주었고, 비구들은 쭉정이가 수북한 겉보리를 그대로 먹을 수 없어 돌에 갈고 빻아 가루(쌀보리)로 만들었다. 때마침 지나가는 한 고마운 여인의 덕분에 보리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붓다는 평상시와 같이 맛있게 공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난다가 안절부절 눈물까지 그렁거리자 붓다는 보리밥 한 덩이를 집어 아난다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난다는 생각과 달리 부드럽고 맛깔스러운 보리밥 맛에 놀라 환하게 웃었다. 

붓다는 밥을 지어준 여인은 이 공덕으로 분명 전륜성왕의 첫째 부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거를 마칠 시기가 이레 앞으로 다가오자 붓다는 아난다에게 성으로 들어가 악기닷따 왕에게 안거를 마쳤으니 다른 나라로 유행을 떠나겠다고 전하도록 했다. 아난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붓다는 “대접이 시원찮았다고 떠날 때 주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손님의 도리가 아니다.”라며 다녀올 것을 당부했다.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악기닷따 왕이 한걸음에 달려와 4개월분의 양식을 내놓으며, 여러 가지 일로 바빠 대접이 소홀했음을 알리고, 지금이라도 공양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간청했지만 붓다는 7일분만 허락했다. 그러나 악기닷따 왕은 한 줌 곡식이 아까워서 성인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두려워 떠나는 붓다의 발 앞에 남은 양식을 흩뿌렸다. 그러자 붓다는 그의 행동을 제지하며 “곡식은 입으로 먹어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곡식을 보시하는 것도, 곡식을 받는 것도 아니다.”라며 “뭇별이 하늘 가득 펼쳐졌어도 해와 달이 광명의 으뜸이듯이 붓다가 세간에 출현하면 그에게 올리는 보시가 가장 으뜸”이라고 일러주었다. 

요즈음엔 쌀이 풍족하고 식생활이 서구화됨에 따라 보리 소비는 크게 줄었다. 그러나 보리의 생리활성 기능성이 재조명되면서 보리국수, 보리빵, 보리 미숫가루, 보리차, 보리음료 등 보리를 이용한 가공식품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당뇨 등 건강관리를 위하여 보리밥 전문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는 눈물겨운 곡식에서 몸을 보하고 오장(五臟)을 튼튼히 해주는 건강식품으로 자리 잡았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교훈은 곡식에도 적용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