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불이 따로 없다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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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검은 토끼해(癸卯年)입니다. 저와 소통하고 공감했던 여러분, 올해도 무지개를 본 듯 가슴 설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둘째딸 정윤경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내에게 검은 토끼 그림을 보내왔군요. 귀는 안테나처럼 쫑긋 세우고 있고, 눈은 무언가를 주시하듯 동그랗고, 몸은 곧 민첩하게 움직일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습니다. 영감을 주는 검은 토끼입니다. 

늦은 산책길에서 본 3층 목탑 형태의 쌍봉사 대웅전이 새삼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대웅전인데, 세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3평쯤 되는 순정한 시골처녀를 떠올리게 하는 법당이지요. 

그래서 윤제림 시인은 대웅전을 보고 자신의 첫사랑 같다고 했을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왼쪽에는 비서실장 아난존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수제자 가섭존자가 협시하고 있습니다. 계묘년을 맞이해 여러분도 대웅전 부처님께 소원을 빌어보세요.

그런데 어느 미국인이 저와 이불재 툇마루에서 대화하고 싶다는 소원을 빌고 있군요. 16년 전쯤 쌍봉사 3층 목탑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동영상을 저에게 보내온 미국인입니다. 16년 전이면 2007년도입니다. 동영상을 보니 초파일 무렵인 듯 영산홍 꽃이 핀 경내에 연등 줄이 설치돼 있습니다. 또한 저녁 무렵인 듯 범종각에서 종을 치는 스님이 보입니다. 동영상 제목은 이브닝 벨 쌍봉사(The evening bell at Ssangbong-sa)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때도 저는 쌍봉사 옆에 살고 있었는데,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할 놀라운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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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사위와 큰딸, 그리고 쌍둥이 손자가 내려와서 어머니 모시고 아내, 조카 현기와 함께 성묘를 했다. 선산이 재 하나만 넘어가면 나타나므로 멀지 않는 거리다. 나는 성묘할 때마다 반드시 할머니를 먼저 설명해준다. 할머니야말로 대를 잇게 한 우리 집안의 기둥이시기 때문이다. 

증조할머니는 보성 선씨, 큰할머니는 진원 박씨, 할머니는 김해 김씨, 큰어머니는 칠원 윤씨이시다. 임진왜란 전후로 장수를 많이 배출한 집안에서 시집오신 증조할머니는 키가 크시어 여장부 같았다고 전해진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간 큰할머니는 글만 읽는 서당훈장의 아내로 참으로 가난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갔지만 숟가락 하나 물려받은 것 없는데, 너희들이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주고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평생 서책을 가까이 하셨던 큰할아버지가 자랑스럽고, 그 남편과 해로한 큰할머니가 고맙기만 하다.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정이 생겨서 그런 줄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는 내가 자리 잡았는데, 멀리 우뚝 솟은 천봉산을 보면 저절로 호연지기가 생겨나는 것 같고, 눈 아래 두 개울물이 합수하는 것을 보면 왠지 명당 같은 느낌이 든다. 어느 때든 아버지 산소에만 올라가면 잡사가 잊혀지고 눈이 맑혀지니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족 모두가 아버지 산소를 각자 소원을 빌며 성묘하고 났는데도 쌍둥이 손자 주영이 태영이가 돌아가신 아버지 등(산소)에 재롱을 부리듯 기대어 있다. 어린이집에서 발가락을 약간 다치어 깁스를 한 아이가 주영이다. 천진한 부처, 천진불(天眞佛)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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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쇠기 위해 내려온 사위와 큰딸, 손자 쌍둥이와 보성 봇재에 있는 나의 문학공원에 다녀왔다. 보성군에서 조성한 군립 문학공원이다. 다섯 살 어린 손자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들렀는데,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겠다. 나의 경우 4살 때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에 손주들도 어떤 인상이 깊이 새겨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학공원을 지나 율포 해변을 손자들에게 보여주고,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귀가했다. 큰딸 부부에게 저녁이라도 외식을 시켜주고, 설 준비를 하느라고 고생한 아내에게 부엌에 들어가는 수고를 덜어주니 일석이조다.

집필을 잊어버리고 오늘 하루를 가족과 함께 보냈다. 집필하는 순간만 행복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불가에서 삶이 고(苦)라고 말하지만 어찌 고만 있을까. 낙(樂)도 고 못지않게 있을 것이다. 물론 욕망과 갈애에 끌려가는 삶이란 결국에는 고통일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고통을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스트레스 정도로 부드럽게 순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고와 낙, 어느 것을 선택하며 살지는, 삶을 어떻게 일궈갈지는 순전히 본인의 몫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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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부터 백설이 난분분 난분분 오시고 있는 중이다. 설 쇠러 온 가족이 모두 떠나고 나니 그 빈자리를 고맙게도 채워주고 있다.

적막한 풍경이 이불재의 본래면목인 듯하다.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첫 번째 드는 생각은 글을 써야 가장 나답다는 것이다. 그렇다. 올해 나에게는 새롭게 시작하는 연재소설이 있다.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될 터. 글쓰기를 수행 삼으니 내 삶과 글이 일여(一如)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