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정암사 (1)

희망이 품어야 삶이랄 수 있어

2023년 1월 22일(음력, 계묘년 정월 초하루) 새벽. 일출을 보려는 마음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가리왕산에 올랐습니다. 붉은 해는 하늘 가득한 구름 속에 묻힌 탓에 볼 수 없었고, 바다에 파도치듯 펼쳐진 산봉우리만 보았습니다. 겨울에는 태백산맥의 하나인 금강산을 뼈만 드러났다고 개골산(皆骨山)이라 부른다지요. 내려다보이는 모든 산이 개골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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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덮인 산에서 보이는 것은 앙상한 가지로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크고 작은 나무뿐입니다. 일 년밖에 살지 않은 나무도 있겠지만, 몇 십 년을 살아온 나무들입니다. 이 나무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듯 잎을 틔우고, 무성해지고, 더 강해질 희망을 꿈꾸면서 추운 겨울 날씨에도 행복할 겁니다. 

해가 보이지 않아도 따뜻한 기색을 느낄 수 있을 즈음, 수마노탑이 있는 정선군 고한읍 정암사로 향했습니다. 가리왕산자락에서 정암사로 가는 찻길은 산의 밑동과 고개를 따라 이리저리 굽어서 이어지며 가파른 산만 보였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길은 폭이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거듭하며 흐르는 아우라지 물길과 한 몸이 되어 흘렀습니다. 샘솟은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이루어졌을 터이고, 동강으로 흘러들어 남한강이 되고, 서울을 거쳐 서해바다로 나가 큰 꿈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강줄기를 이룬 물도 샘솟을 때부터, 가리왕산의 나무처럼 큰물이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예부터 흘러내렸을 겁니다.   

정암사 주차장은 왕복 1차선의 “함백산로” 에 한 몸으로 붙어있습니다. 지금이니까 이동과 접근이 쉽지, 예전 같으면 수원에서는 ‘가겠다’는 마음조차도 벼르고 별러야 낼 수 있었을 겁니다. 어느 곳이든 쉽게 오갈 수 있어서, 부처님을 뵙기가 훨씬 쉬워졌는데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지 않음이 참회될 뿐입니다.  

잘 사는 인생이 중요하지, 어디서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일주문은 자동차에서 문을 열면 보일 정도로 가깝습니다. 이것도 찻길이 났으니까 볼 수 있는 것이지, 길이 뚫리기 전에는 고개를 오르며 머리를 제켜야 보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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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편액에는 “태백산 정암사”라 쓰였습니다. 정암사에서 거리를 재면 태백산보다 함백산이 더 가까이 있고, 산 정상도 함백산이 더 높음에도 편액에 태백산 정암사라 쓰여 있는 것이 궁금합니다.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여래가 중생 아닌 것을 설함이며, 그 표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경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이곳이 태백산인가? 정암사인가? 태백산에 있는 정암사인가?’를 따지지 말고, 법신을 찾으라는 뜻이려니 하였습니다. 

깨끗한 행을 지니고 사이좋게 지내면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축대를 높이 쌓아 올린 터 위에 지은 여섯 칸짜리 전각이 보였습니다. 현판은 “선불도량(選佛道場)”. 글자 풀이를 하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이라는 말이겠습니다. 그 말인즉, 부처가 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사람들 중에서 부처를 뽑는 사람도 있는 곳입니다. 사부대중이 모여 참선하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곳이라는 짐작을 해 봅니다.

그렇게 짐작하면서도‘부처를 선발한다’는 말에 걸려서, 어떤 것을 갖추어야 부처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어쩌면 일주문을 지나치면서 “선불도량” 현판을 보자마자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분도 계셨을 것이어서, 나는 지금 어느 땅에 발을 딛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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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발 걸은 후 나타난 선불도량의 다른 쪽에 걸린 현판은 “육화정사(六和精舍)”. 앞쪽과 뒤쪽이 서로 다른 현판을 걸고 있는 전각입니다.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쪽인지. . .  

육화정사, 글자 풀이를 하면 신구의(身口意)를 맑게 하고, 계를 지키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남들과 균등하게 갖는 가르침을 갈고닦는 집입니다. 앞뒤가 같은 형태로 지어졌는데, 각 칸마다 육화당1, 육화당2 등의 이름표가 붙어서 선불도량으로 부르든 육화정사로 부르든 전각의 용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암사 창건 설화

자장율사는 세상과의 인연이 얼마 남지 않은 때, 문수보살 친견하기를 서원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당나라 유학중 오대산에서 만났던 범승(梵僧)이 나타나 “내일 밝은 날 대송정에서 만납시다”라는 말에 놀라 깨어납니다. 날이 밝기 무섭게 대송정으로 내달린 자장에게 범승은 “문수보살께서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는 말을 전하고 사라집니다.

태백산을 헤매다니고 이리저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던 중 “갈”자가 칡을 뜻하고, “반”자가 엉키어있음을 뜻하는 말에서 실마리를 찾아 갈반지를 찾게 됩니다. 그곳에는 칡넝쿨만 엉켜있는 것이 아니라 10여 마리의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스님이 화엄경을 독송하자 엉켜있는 몸을 풀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 꿈에 뱀들은 ‘자신들은 공부하던 승려였으나 수행을 게을리하고 시주물을 낭비한 과보로 뱀의 몸을 받았는데, 자신들의 몸을 바꿀 수 있도록 법문을 설해 주옵소서’라는 청원을 드립니다.

스님께서 이를 받아주셨고 독송한지 7일째 되던 날 구렁이들은 해탈하고, 이들을 화장한 자리에 나타난 금은보화로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정암사의 창건 설화입니다.

자장율사의 서원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원하여,‘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알려진 오대산(중국)에 가서 간절히 염원하였습니다. 기도드린 지 7일째 가 되는 날, 꿈에 그토록 뵙기를 원하던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범어로 된 게송을 일러주십니다.

범어 게송을 도저히 알 수 없던 차에 누더기를 걸친 스님이 찾아와서 풀이를 해 줍니다.  

“온갖 법을 알고 보면 제 성품 아무것도 없나니, 이렇게 법의 성품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則見盧舍那 (료지일체법 자성무소유 여시해법성 즉견노사나)

누더기 스님은 가사와 부처님 진신사리를 건네주면서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 잘 모시도록 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자장 스님은 신라로 돌아올 때에야 범어 게송을 풀이해 준 스님이 ‘친견하기를 원하던 문수보살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은 친견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보고 싶었던 A를 실지로 만났으면서도 B로 알았다면, B를 만난 것이지 A를 만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들과 딸을 알지 못하는 치매 증상이 있는 환자는 아들딸을 마주하고 있어도, 아들딸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자장 스님께서 범어 게송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조바심 때문에 문수보살님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누더기 헌 옷을 걸친 남루한 차림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장 스님은 바로 앞에 현신한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한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기도에 용맹정진하셨습니다. 

문수전

문수전은 앞쪽이 다섯 칸인 팔작지붕 집입니다. 각 칸은 네 짝으로, 두 짝씩 밖으로 접어지면서 열리는 여닫이 창호를 달았습니다. 출입문은 가로 살과 세로 살의 간격이 같은 정자(井字)살 창으로, 법당 내부를 밝히는 광창과 마찬가지로 촘촘한 간격으로 짜였습니다.

단청은 비단에 수를 놓은 듯 보이는 금단청을 올려 최고로 높은 장엄을 드렸습니다. 금단청은 복잡한 무늬가 연속되는 특징을 가졌는데, 양록색이 칠해진 광창과 출입문의 촘촘한 살과 어울려서 문수전을 더 화려하게 보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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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을 받는 기단의 높이를 좌측은 두 벌대로, 우측은 세 벌대로 쌓았는데, 이는 경사가 급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음을 보여줍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대지를 평평하게 하고 집을 짓는 것보다 기단을 평평하게 잡는 것이 훨씬 쉬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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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전은 도량을 들어서서 처음 닿는 전각이건만, 처음부터 문수보살을 모시려고 지은 전각은 아닌 듯싶습니다. 왜냐하면 여섯 개의 기둥에 주련이 걸렸는데, 안쪽으로 걸린 네 개의 현판만 글씨체가 같고, 바깥쪽 두 개의 기둥 현판은 다른 글씨체입니다. 짐작건대 세 칸으로 지은 문수전에 걸렸던 주련을 다섯 칸의 이 법당으로 옮기고 보니, 주련을 걸지 못한 기둥 두 개가 법당의 안정감을 덜어낸 듯 보였고, 그래서 문수보살을 칭송하는 기존의 주련과 어울리는 두 글귀를 새로 지어 좌우 측 바깥 기둥에 걸었다는 생각입니다. 

세 칸에서 다섯 칸으로 법당을 넓힌 것은 어쩌면 문수보살 친견을 간절히 염원한 자장 스님의 염원을 받들려는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문수능소정업지 조인항작칠불사 대지역위보살수 찰찰현신시무신 보령중생초삼유 

대비여실대혜허  

文殊能消淨業地 祖印恒作七佛師 大智亦爲菩薩首 刹刹現身示無身 普令衆生超三有      

大悲如實大慧虛   

문수보살께서 모든 삿됨을 쓸어내신 청정 도량.

부처님의 진리를 짓는 문수보살은 과거불의 스승이셨고

큰 지혜도 보살 중에 으뜸입니다.

온 국토에 몸을 나투심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생들이 고루고루 삼계를 벗어나게 하십니다.

문수보살께서 베푸는 대자비는 허공같이 큰 지혜입니다.(의역하였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측에서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우리는 “대지문수사리보살”로 호명합니다. 큰 지혜와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번뇌 망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교화하고 계심을 나타낸 주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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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상단에 문수보살을 모셨습니다. 문수보살의 불상은 대부분의 법당에서 볼 수 있듯 석가모니 부처님의 협시보살로 청사자가 장식된 연화좌에 좌정하시고, 탱화에서는 청사자를 타고 계신 모습으로 조성됩니다. 문수보살께서 중생의 어리석음을 끊어낼 수 있는 지혜의 칼을 갖고 계시지만, 부처님의 좌보처로 협시하실 때에는 오른손으로 푸른 연꽃을 들고 왼손은 연꽃대를 받치는 자세로 좌정하십니다. 이때 우보처인 보현보살은 왼손으로 붉은 연꽃을 들고 오른손은 연꽃대를 받쳐 좌우 균형을 맞게 보살상을 봉안합니다.

문수전에 모신 문수보살 불상이 보현보살의 모습이어서 의아심이 들기도 하지만, 보살님도 한 자세만 취하기가 어려우면 바꿀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후불탱화는 검은 먹을 몇 차례 칠하고, 모든 선은 금물로 그린 뒤 얼굴만 살색으로 입히는 먹탱화가 걸렸습니다. 탱화에는 호위 신장과 문수동자가 그려졌는데, 뒤에 그려진 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신다는 오대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먹탱화의 밑바탕인 검은 어둠은 중생들이 깨닫지 못하는 깊은 무명을, 금빛은 이를 밝혀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할 거라고 지레 짐작해 보았습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