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날만큼 사무치게 살자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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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일 이불재의  꼭두새벽, 컴컴하지만 사립문 너머의 소나무 다섯 그루가 깨어있는 모습이다. 늘 느끼는 바지만 소나무 다섯 그루야말로 이불재를 지키는 신장님 같다.

목탁소리가 아래 절 쌍봉사에서 골짜기를 공명하며 맑게 들려온다. 새벽마다 이불재의 공간은 물론 내 영혼을 씻어주고 내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고마운 소리다.

오늘은 3시 30분에 일어나 어젯밤에 보낸 아내의 편지를 읽고 아내 메일에 답장을 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아내는 새해 전날 밤에 해마다 손편지를 써서 내가 잠든 사이 내 책상 위에 놓아두곤 했던 것이다.

5시까지 2월 중에 연재할 장편소설을 구상한 뒤 진돗개 행운이에게 줄 먹거리를 화목난로에 데워 주었다. 따뜻한 음식을 주어야  간밤을 무사히 보낸 행운이가 덜 추울 것 같다.

새해 첫날이기 때문인지 글을 쓴 것이 작가로서 무슨 의식을 엄숙하게 치른 듯하다. 그렇다. 선심초심(禪心初心)이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선(禪)의 마음이란 뜬구름 위에 있는 고상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발원했던 내 안의 첫마음이란 뜻일 게다. 선이 선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라.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절감해야 한다. 첫마음을 잊지 않는 그 결심이 늘 눈물이 날 만큼 사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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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지인 범선 거사님의 호의로 온천수가 나오는 호텔에서 1박 하고, 오늘 10시에 통도사 서운암에 주석하고 계시는 조계종 성파 종정 스님을 찾아뵙고 아내와 함께 세배를 드렸다. 종정 스님은 도자기와 천연염색, 옻칠 등의 작업을 계속해오신 예술가이시다. 

작년에 한글창제 비사를 다룬 내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보내드렸는데, 직접 전화를 하시어 “통도사를 한 번 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종정 스님께서는 조선시대 때 불교가 어떻게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았는지를 말씀하셨다. 여러 문화적, 예술적 방편 등으로 평민들에게 더욱 스며들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눈이 환해짐을 느꼈다. 그 방편들 중의 일부는 여러 종교들이 교세를 과시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해서였다.

한편, 훈민정음의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에서 어리석은 백성은 한자를 아는 식자층이 아닌 대부분 평민 불자였을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하셨다. 그러고 보니 타당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을 산으로 쫓아버린 태종(이방원) 전의 임금인 태조와 정종 때만 해도 요즘 교회처럼 마을마다 나라와 평민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복사(資福寺)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평민들의 일상적인 삶이 불교와 함께 하고 있었던 사실로 보아 세종 때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종정 스님의 성품은 이전의 종정 스님이었던 성철 스님이나 혜암 스님, 법전 스님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격의 없이 소탈하시고 봄바람같이 자애로우셨다. 2시간 동안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아주 이례적이고 특별한 배려'라고 동행한 김윤희 대표가 알려준다. 특히 2월 말쯤에 불광출판사에서 발간될 나의 대하소설 <아쇼까대왕>에 추천사도 써주시겠다고 하신다. 

벽에 걸린 스님의 흑백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자유와 열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젊은 시절, 멜빵바지 차림으로 작업하시는 모습인데,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연상시킨다. 

현재 불편하신 발목이 괜찮아지고 동안거 해제하면 이불재를 한 번 들르시겠다고 하시니 벌써부터 동업자(?) 중생인 내게 어떤 영감을 주실지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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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초에 몇 분의 스님들이 이불재 떡국을 드셨다. 1월 2일에는 안국선원 수불 선원장 스님께서 대흥사 가시는 길에 이불재를 들러 일행 세 분과 함께 떡국 점심을 드셨고, 오늘은 쌍봉사 증현 주지스님과 법주사 강주를 지낸 도반 스님, 쌍봉사 이행자님이 점심으로 떡국을 반듯하게 드시고 내려가셨다. 아내가 아침 일찍부터 마음을 내어 준비해 올린 떡국 공양이었다. 

쌍봉사 주지스님께서는 출가 전에 먹었던 그 떡국 맛이 나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났다며 고맙다는 말을 덧붙여 문자를 보내왔다. 어머니가 떠올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스님이 순수해서 이번에는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내가 지난 연말에 쌍봉사 회주스님 이하 공양주 보살까지 모든 대중에게 양말세트 선물을 돌렸는데, 떡국 공양은 그 연장선상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공양도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크든 작든 공양하는 기쁨보다 더한 것이 없을 듯하고, 마음의 평수를 넓혀가는 그만한 수행도 없지 않을 것 같다. 

달마대사는 '마음이 넓기로는 허공과 같고, 좁기로는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고 했다. 24시간 허공 같은 부처님 마음으로 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시시각각 마음의 평수를 넓혀가려는 발원을 하되, 그 일념(一念)이 만년(萬年)이듯 살아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