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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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비가 계속되고 있다. 비는 동굴 앞에 소리 없이 떼 지어 땅으로 흘러내린다. 이 회색 공간 속에서 바라보는 빗줄기, 내 눈은 연약하고 몽롱하다. 그러나 그것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10월인데도 조금도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을장마인지 비는 아파 누워 있는 삼사일을 줄기차게 내린다. 그동안 큰 사발에 있는 물만을 마셨을 뿐이다. 아무도 모르게 “이제 정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는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눈을 감고 있다. 눈을 감으면 끊임없이 떠오르는 얼굴들……. 그러나 제법 회복이 되어 눈을 떴을 때는 동굴 안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햇빛을 본 그 순간 또 울었다. 햇빛. 동굴 속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햇볕의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전에는 들리지 않던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날개를 가진 것들의 무성한 합창, 전혀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 그 귀한 손님으로 하여, 이 동굴에서 내려다보는 외설리는 그야말로 극락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죽어 다행히 극락에 간다면, 그곳이 이곳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극락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단언하건대 저리 올망졸망 집터를 마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골골 산맥을 만들고, 산산 물을 만들어, 서로서로 만나게 하는 이런 마을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서로 깃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 저녁이면 피어오르는 연기, 하여 몇 번을 마을로 내려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머지않은 날에 그런 행동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멀리 청리역(靑里驛)을 지나는 기적소리가 들린다. 움직이고 싶다. 기차를 타고 싶다. 누구라도 만나고 싶다. 산을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물 끓듯 일어난다. 그러나 군인이나 경찰에게 잡힌다면 경묵이도 끝장이다. 동구 밖 마당에서 그가 불빛을 보내면 밤에 그가 온다는 신호다. 그러나 오늘 경묵이는 불빛을 보내지 않는다.

 그녀가 보고 싶다. 그녀는 나와 혼인하지 못한 여인이다. 한 번도 함께 살자고 이야기하지 않은, 그야말로 동지다. 그녀로 인해서 아내 임순이에게 미안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바람 같은 날을 바람 같은 거리를, 바람처럼 함께 떠다녔다. 내가 그녀의 개인사를 묻지 않았듯이, 그녀 또한 내 개인사를 묻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하늘의 이야기만을 하였다. 거리에서도, 산에서도. 그렇지만 서로 가랑잎처럼 불려온 거리의 흔적을 알고 있다. 낱낱. 

 실습 차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녀가 종로 안국동에 있는 한 서점에 들러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을 찾았다.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학생들 사이에도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사회주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가 마르크스 엥겔스의 책을 찾은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인생 전체를 바꾼 계기가 되고 말았다. 30대의 서점 주인은 다음 날 오면 구해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서점을 들렀을 때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양장 차림의 부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학생이 마르크스 엥겔스의 책을 찾았어요?” 그렇다고 공손하게 대답을 하자 부인은 그녀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큰 키에 하얀 얼굴, 전형적인 서울 말씨를 쓰는 부인은 당시의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인텔리로 보였다. 부인은 “그 책을 구하기는 힘들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날 수만 있다면 공부는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부인의 외모와 말하는 태도에 끌려 그 자리에서 응낙했다.

 그 뒤 6개월 동안 부인과 그녀는 서점서 만나거나 음식점, 길거리 고궁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한두 시간씩이었는데도 그녀는 그 부인에게 매료당하고 말았다. 

부인의 박람박식은 동서고금, 어느 곳에도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는 진짜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체도 모르는 부인에게서 일찍 세상을 등진 어머니를 느꼈다. 부인 또한 그녀를 친 딸 이상으로 특별하게 대했다. 단 몇 달 만에 둘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부인은 자신의 정체는 끝내 밝히지 않은 채 독서의 방향 체계는 물론이고, 그녀의 장래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하였다. 

 부인은 그녀에게 학교 내에서 개별적으로 독서 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녀가 부인의 말을 어길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 부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할 작정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때까지 부인이 남로당의 핵심 간부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와 부인은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이나 원산에서 만나는 때도 있었다. 원산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12월의 어느 날……, 부인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녀는 부인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처음 만났던 서울의 그 서점에도 가보았으나,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그 후 1년쯤 지난 이듬해 신문에 난 부인의 검거 기사를 보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바로 조선공산당의 최후 재건에 힘을 쏟던 유일한 여성 이형숙, ‘콤. 그룹’의 간부였던 것이다. 이형숙은 서대문, 청주 형무소를 전전하다가 해방되던 해 4월 청주 형무소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가 옥사하였다. 물론 그녀는 이형숙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형숙의 눈빛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녀가 경찰로부터 전달받은 이형숙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 서울의 ‘노력’에서 만났던 나의 딸 보경, 그 6개월의 시간이 내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열정과 갈망을 내 딸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후로 그녀는 이형숙을 대신하는 삶을 살았다. 

 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사람, 그러나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백천사에 놓고 간 이불만 벌써 다섯 채가 넘는다. 나는 등불을 걸면서 아내 임순이를 생각하고, 편안한 침상에 공단 이불을 덮고 누우면서 그녀를 떠올린다. 그러면 어떤 추위라도 견딜 것 같다. 내 몸을 갉아먹는 몹쓸 병균만 없다면.

 ……우리 인민군은 오늘 이들 애국적인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하고 오랜 기간 동안의 항일 무장투쟁을 통해서 그들에게 축적된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창설된 것이다…….

 1948년, 김일성의 이 말을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정권을 장악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박헌영이 그를 믿었다. 그리고 나는 박헌영을 믿었다. 

 박헌영.

 세력 기반을 남한에 두고 ‘수십만 남로당원의 봉기’를 호언장담했던 사람. 외세를 등에 업고, 혹은 알량한 지식을 등에 업고 우쭐대는 사회주의자들을 병균이라고 했던 사람,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반인 남한에서 도망쳐 나오는 순간 날개 부러진 새나 다름없어 김일성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작은 키에 두툼한 얼굴, 그래서 그의 별명은 땅딸보였다. 자라서는 까무잡잡한 얼굴 탓에 기왓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날 때부터 서자라는 불운을 안고 태어난 사람. 언제나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던 사람. 카랑카랑한 목소리, 

 서대문 형무소에서 두 번이나 목을 맸고, 벽에 온몸을 부딪쳐 몸이 만신창이가 되자 할 수 없이 독방에 수감되었던 사람. 대변을 손에 바르고 낄낄거리며 심지어는 먹기도 한 사람. 간수들도 두려워한 사람. 필요하다면 부모를 죽인 원수와도 손잡겠다고 한 사람. ‘인민의 친애하는 벗’이라는 칭호를 단호하게 거절한 사람. 그는 누구도 자신을 영웅이라고 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주변으로 많은 공산주의 이론가들을 몰리게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로당의 총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누구와도 만났으면서도,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나는 박헌영을 해방 전후로 여러 번 보았다. 그를 볼 때면 언제나 가슴이 뛰었다. 처음은 청주 아지트에서였고, 두 번째는 안국동 행림서원에서였고, 세 번째는 서울 운동장에서였다. 

 1946년 박헌영이 서울 운동장에 온다는 것 때문에 송곳 하나 세울 여지도 없이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나와 그녀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시위 행렬은 서울 운동장에서 남산 꼭대기까지 연결되었고 행렬은 8명 이상씩 편성되었다. 모인 군중이 30만이 넘는다고 했다. 오합지중이 아니고 과거 1년간 민전 산하 각 단체에서 민주주의적으로 조직 훈련된 의식 있는 대중이었다. 그녀의 눈은 활활 타고 있었다. 

 8.15기념 데모로서 좌익 진영은 확실한 군중을 업고 있음이 입증되었고, 또한 민주주의적 교양으로 조직 훈련된 의식적 대중임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위대한 민전을 분열시키고 공산당을 고립하며 내부 분열을 시키려는 반동 세력의 모략이 완전히 분쇄되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