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ㆍ기고 > 현장스님의 불교 속의 역사 여행

동래부사 조엄의 전생은 범어사 낭백 스님이다.

미디어붓다 | mediabuddha@hanmail.net | 2022-11-15 (화) 10:26

조선에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조선통신사 조엄 이야기 



최초로 고구마를 들여온 동래부사 조엄 진영.
 


고구마를 먹을 때는 이 나라에 처음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과 낭백 스님의 큰 서원을 생각해야 한다.

고려 말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화 씨앗을 가져와서 입을 거리에 혁명을 가져왔다. 문익점 아들 이름이 무명이고 손자는 문래이다. 무명이 집에서 물레 돌려서 목화솜을 탔던 것이다.

조선 영조 때 조선통신사로 갔던 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와서 조선의 먹거리 혁명을 이룬 분이다.

조엄은 1719년 원주에서 이조판서 조상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조 14년 생원시에 합격한 조엄은 동래부사를 거쳐 1758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임용된다. 관찰사 재임 시에 경상도 내 사노비 1만여 명의 노비 공역을 감면시켜 주고 감세 비율을 적용하여 조세부담을 줄여 주었다.

그 당시 일본은 도꾸가와 막부의 9대 이에시게가 물러나고 그의 아들 이에하루가 정권을 계승하여 선린우호의 외교관계를 청해 왔다. 영조는 조엄을 정사로 삼고 이인배를 부사로 삼아 제11차 조선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낸다.

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서 조선 백성들의 구황작물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종자를 가져왔다.

2014년 부산 영도구청은 고구마 시배지라는 역사적 가치를 살려 조엄 고구마 역사공원 건립계획을 발표하였다.


조엄 일본 통신사 목판도.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박해를 받고 승려는 천민으로 신분이 추락하였다. 사찰에는 수십 종류의 부역이 내려왔다. 그 당시 범어사에 부과된 부역의 종류만 해도 36가지나 되었다. 

스님들은 대가 없는 부역에 내몰려 기도하고 수행할 시간도 없었다.

그때 범어사에 낭백 스님이 계셨다. 숭유억불정책의 폐단을 고치고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기를 서원하였다. 낭백 스님은 큰 서원을 세운 그날부터 불전에 발원하고 보시행을 닦았다.

이 세상의 모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베풀고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물을 주고 길가는 나그네에게는 짚신을 삼아 베풀기를 서원하였다. 마지막 육신은 호랑이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이 나라의 고위 관리로 태어나서 반드시 폐단을 고칠 것을 서원하였다.

낭백스님은 지금의 금정구청이 있는 기찰에 가서 반송 밑에 우물을 파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식수와 쉼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대낫들 지금의 동래온천 부근에서 수박과 오이를 심어 오가는 사람들의 허기와 기갈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기장으로 넘어가는 칼치재에다 초막을 짓고 여행자 숙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밤이면 짚신을 삼고 주먹밥을 만들어 여행자들을 보살폈다.

일생을 무주상 보시행으로 살아온 스님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이 오자 호랑이를 찾아 나섰다. 호랑이에게 육신을 베풀기 위해 3일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호랑이가 나타났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두려움 없이 육신을 베풀고 흔적 없이 열반에 들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삼 일간을 헤맨 경우는 있지만 호랑이에게 육신을 베풀기 위해 삼 일간 헤맨이는 인류 역사에서 낭백 스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호랑이를 찾아 나서기 전에 낭백 스님은 범어사 스님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1. 나는 이제 육신을 떠나지만 새로운 육신으로 범어사에 다시 돌아온다.

2. 내 방문은 내가 잠그고 간다. 내가 다시 와서 열 테니 아무도 열지 말라.

3. 나는 조정관리가 되어 범어사에 찾아온다. 다른 관리들은 일주문 앞에서 말을 내리지만 나는 어산교 앞에서 내릴 것이다.

4.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내가 해결해 줄 것이다.

낭백 스님이 입적하시고 40년이 지났다. 동래부사 조엄 일행이 범어사를 방문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남긴 네 가지 유언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전생에 사용하던 방문을 여니 글씨가 한 점 있었다.

개문자시 폐문인..

이 문을 닫은 자가 이 문을 열 것이다.

사찰의 주지를 불러 고충을 물었다. 그는 범어사에 부과된 36가지의 부역을 폐지하였다. 



범어사의 조엄 공덕비.(사진=석현장 스님)



범어사 어산교를 지나가는 매표소 가는 길에는 다섯 개의 비석이 있다. 그중 가운데 비석이 조엄 공덕비이다. 이 비석은 순조 8년 1908년 조엄공의 후손인 조중려가 범어사의 요청으로 써준 것이다.

조엄공은 조선 영조 33년 (1757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사찰에서 부과되는 부역을 없애고 3년 후에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범어사에서 납부하는 책역을 영구히 소멸되게 하였다. 쇠잔해진 사찰을 구원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한 공덕을 기려 송축하는 뜻을 표시한다.

고구마를 먹을 때는 굶주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서원했던 낭백 스님의 큰 서원도 함께 먹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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