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봉규 / 사진 장명확
2022-11-15 (화) 09:32蓮이를 위하여 3
내 이름은 김동수(金東洙) 1918년 2월 15일 경북 상주군 청리면 외설리(外雪里) 출생. 지금은 허명만 남은 남로당 제7야체이카 총책. 국적은 없다. 직업도 없다. 농부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 고향 외설리에서 가장 높은 청리산에 산다. 하나 둘 살아 있는 것들이 저편 서녘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분명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햇볕은 끊임없이 쪼개진다.
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잘못된 인간의 넋두리도 아니며, 그렇다고 훌륭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의 기록도 아니다. 다만 나는 혼돈 속에서 살았고, 아직도 그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 과정이므로, 이 이야기는 행복하지 못했던 한 젊은이의 풍경화일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앙은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목숨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떠한 길을 갔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 하여 일찍 떨어진 많은 목숨들이 있다. 그것으로 하여 나는 잠을 청할 수 없다. 얼굴을 씻지 못한다. 머리칼을 자를 수도 없다. 우우웅! 우우웅! 차라리 둥지를 갖지 못하고 산산을 떠도는 짐승이었으면…….
내 몸이 결코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수없이 저승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멀어져 가는 이 청리산 생명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알고 있다. 그들은 아무도 소리 하지 않는다.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흔적 없이 퇴장한다. 오리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지면 굴참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진다. 키 작은 사시나무가 스치는 바람에 울면 어제까지 햇볕을 받던 모든 잎사귀들이 간 데가 없다.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자꾸만 햇볕을 조르는 산비둘기들의 날갯짓, 시시각각 겨울을 몰고 오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
나는 병자이고, 내가 앓고 있는 이 병은 걸린 사람이면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결코 불유쾌한 병은 아니다. 병은 견딜만한 정도로 서서히 악화되고 있다. 사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장단의 시간차는 있겠지만.
병자면 누구에게나 고통을 이기기 위한 적절한 방도가 필요하다. 내가 이용하고 있는 방법은 오로지 글을 쓰는 것뿐이다. 그러면 이 고통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나는 달빛을 이용해 글을 쓴다. 별빛을 이용해 글을 쓴다.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눈으로 컴컴한 동굴 천장에 글을 쓴다. 아니 그리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해가 떠 있는 낮에는, 나의 마을, 나의 집을 보고 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반사로 나의 마을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끼니를 거르기도 하였다. 초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기 위해서 꼴딱 밤을 새기도 하였다. 내일 아침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날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내 병이 깊어짐과 함께.
경묵이가 가져다준 빈 공책에 하루하루 내가 써야 될 분량의 글만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저 내가 그전에 다른 책에서 초록해 놓은 글을 백지 위에 그대로 다시 옮길 때도 있다. 그러면 눈물이 흐른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내가 느끼지 못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가랑잎처럼 서러운 문자만을 남기고 가버린 사람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땅을 파는 농부가 되고 싶었다. 호미나 쟁기로 흙을 파고 싶었다. 그리고 눈보라 한겨울 동안 초조하게 봄을 기다리고 싶었다. 어김없이 찾아준 그 봄에 감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나를 이곳에 데려왔고, 나를 키워 준 이 땅에서라야 했다. 이곳의 풀꽃이어야만, 풀꽃이었고, 이곳의 바람이어야만 바람이었고, 이곳의 구름이어야만 구름이었다. 다른 땅에서의 곡괭이질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팔을 흔들고 함성을 질렀던 단 하나의 명백한 이유가 어쩌면 길손처럼 왔다 가는 마을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저 샛말 산 녘을 무섭게 태우는 붉은 참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이 동굴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원혼이 있다. 왜란 때 이곳에 숨었던 마을 사람들이 그대로 죽임을 당했다. 왜군들이 동굴의 입구를 틀어막은 것이다. 난리가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동굴을 열었을 때, 벽면엔 온통 손톱으로 긁은 붉은 핏자국들이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캄캄한 어둠을 뚫고자 했던 생존 의식, 그러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해방이 되고, 김일성 정부가 그렇게 공들였던 조선노동당, 자부했던 북쪽의 강력한 농민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유엔군에게 협조적이었다. 유엔군과 국방군의 흥남 철수가 그 단적인 예다. 지금 북한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대대로 내려온 농토를 버릴 수 없는 붙박이들이거나, 남한으로 탈출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나로 하여 붉은 완장을 찼던 여기 남쪽 내 동무들은 죽음이 두려워 북쪽으로 갔다. 함께 살던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나만 홀로 남았다.
그렇지만 죽을 때까지 여기 이 청리산 언덕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람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어제 만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나는 가졌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난 행복한 사람이다.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정경묵.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적당했다. 한가을의 교정 화단엔 온갖 가을꽃들이 만발하다. 하지만 면사무소가 있는 학교 근처의 아이들은 산을 세 개나 넘어 다니는 외설리 아이 하나를 놀려먹고 있었다, 박정운. 정운이는 아버지 고향이 함경도였다. 북선[北朝鮮] 애라는 것이다. 더구나 엄마는 천리만리로 정신이 나가버렸다. 면의 아이들은 모두 정운이를 둘러싸고 거칠게 을러댔다. 면 아이들이 발동하면 인근 촌마을의 아이들은 누구도 근접하지 못했다. 엄마 아버지가 있는 마을이 학교와 너무 멀었다. 그래서 학교와 가까운 면 아이들의 세도는 가히 맑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결국 정운이는 운동장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울고 있었다. 그때 마치 유령처럼 나타난 아이가 있었다. 정경묵. 경묵이는 키도 크지 않았고, 힘도 세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직 누구하고 싸워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의 손엔 화단에서 뿌리째 뽑은 키 높은 코스모스 다발이 들려 있었다.
“이건 뭐야?”
모란 면 아이들의 대장 격인 단수학이 대뜸 앞으로 나섰다. 인근의 아이들에게 단수학은 선생님보다도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누구도 단수학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묵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뜩 코스모스 다발을 움켜쥔 채 단수학을 향해 걸어갔다. 단수학을 비롯한 면의 아이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얼굴엔 두려움이 역력했다.
“저리 가!”
약간은 겁먹은 얼굴로 단수학이 정경묵을 노려봤다. 그러나 경묵이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단수학을 향해 코스모스 다발을 내리쳤다. 단번에 단수학이 가을꽃들이 가득한 화단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경묵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단수학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단수학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경묵이의 코스모스 매질이 시작됐다. 하얗게 질린 단수학의 코에서 피가 나고 옆에 있던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경묵이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단수학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고는 정운이보다도 더 크게 울었다. 급기야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한꺼번에 뛰어나와 경묵이를 단수학에게서 떼어놓을 때까지 코스모스 매질은 계속되었다. 그 일이 있는 이후로 모란 면의 아이들은 누구도 외설리의 아이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북쪽 하늘로 양떼구름이 흘러가는 늦가을이었다.
동봉 스님.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남쪽에 있던 인민군이 북으로 황급히 후퇴했다. 당연히 인공기를 내걸고 팔뚝에 완장을 찼던 남쪽 ‘빨갱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철없는 열여덟 살의 영훈이와 광수도 그런 남쪽 빨갱이였다. 그들은 외설리 청리산의 백천사에 피신했다. 백천사 주지였던 동봉 스님은 절을 찾아오는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가는 사람 그 누구도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영훈이와 광수는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던 그 겨울을 백천사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붉은 석양이 서쪽으로 기울며 아지랑이를 태우던 어느 봄 저녁. 어떻게 알았는지 국방군과 경찰들이 새까맣게 백천사로 몰려오고 있었다. 두 명의 어린아이를 잡기 위해 인근의 군경이 총출동한 것이다. 동봉 스님은 대웅전 뒤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던 두 아이들을 깨웠다. 아이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배운 대로 대뜸 장총을 집어 들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동봉 스님은 그 아이들을 뒷간으로 끌고 갔다. 거의 사람 한 길이나 되는 뒷간이었다.
그리고 두 아이 모두를 똥통 속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태연히 아이들의 머리 위로 오줌을 누고 볼일을 봤다. 깊고 어두운 똥통의 수렁 양옆에 붙은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국방군과 경찰들이 아무리 찾았으나 빨갱이를 찾을 수 없었다. 동봉 스님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청리산 찔레 순이 하늘의 별처럼 올라오는 4월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