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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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서당에서 나이 겨우 아홉 살인 소년 하나가 <사략(史略)>을 읽고 있었다.

“태고에 천황씨(天皇氏)가 있었다 ……”

첫 대목을 읽던 소년은 선생을 향해 물었다.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다 하였는데 그러면 천황씨 이전엔 누가 있었습니까?”

당돌한 물음에 선생은 당황했다.

“그렇지! 천황씨 이전에는 반고씨(盤古氏)라는 임금이 있었지.”

소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선생은 그 이상 소년의 회의를 풀어줄 수 없었다. 이 소년이 바로 한국 불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경허의 제자, 한암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대해 스스로 캐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1876년 강원도 화천(華川)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전란을 피해 고향 맹산(孟山: 평안남도)을 떠나 낯선 화천 땅에서 피난하는 동안 얻은 아들이다. 500년 왕업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숨 가쁜 이조 말엽, 당연히 그의 삶 또한 순탄할 수 없었다.

반고씨 이전에 누가 있었을까? 그 후 십여 년 동안 아무리 유학의 경들을 공부해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학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할 길이 막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암은 나이 스물두 살에 금강산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취한 충격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금강의 위용을 바라보며 속세를 등지고 출가해 입산수도할 것을 결심한다. 당시 금강산의 명찰 장안사(長安寺)에는 유명한 행름노사(行凜老師)가 주처하고 있었다. 그는 노사를 의지해 수도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출가하며 스스로에게 다음 세 가지의 약속을 했다. 첫째, 자기 마음의 진성을 찾아보자. 둘째, 부모의 은혜를 갚자. 셋째, 반드시 극락으로 가자. 그는 불교 교리의 깊은 뜻을 공부하기 위해 신계사(神溪寺)의 보운강회(普雲講會)에 나갔다. 그리고 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읽어내려 가다 크게 깨달았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해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소신연비(燒身聯臂)의 고행을 하고 팔만장경을 모조리 독송하더라도 이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일과 같아 오히려 수고로움을 더할 뿐이다. 

한암은 울었다. 죽음을 느낀 것이다. 그때 마침 자신이 머물던 장안사의 암자가 하룻밤 사이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생자필멸의 순리를 뼈가 저리게 체득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한단지몽(一場春夢), 한바탕 꿈인 것을 깨달았다. 한암은 그 후 도반인 함해선사와 동반해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운수의 길에 올랐다. 그는 남쪽을 향해 흘러가다 경북 성주 청암사(靑巖寺) 수도암(修道庵)에서 경허를 만났다. 첫 만남이었다. 경허는 그를 만나자마자 <금강경(金剛經)>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형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如來)를 볼지라.”

이 구절을 듣자 한암은 세상이 보였다. 우주 전체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 아님이 없었다. 아홉 살에 서당에서 처음 가진 의문은 아침 안개가 걷히듯 모두 풀렸다. 그의 나이 27세, 가을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脚下靑天頭上巒 

本無內外亦中間  

跛者能行盲者見 

北山無語對南山 

다리 밑에 하늘이 있고 머리 위에 땅이 있네.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네. 

개심을 넘다

한암은 또 스승 경허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대중들도 있었다. 경허는 그 자리에서 외쳤다.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여기 모인 대중들아, 이것이 무슨 소리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한암이 일어섰다.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互墻)이 앞에 있다.”

대중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경허가 지그시 웃었다.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한암은 30세 되던 1905년 봄,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 내원선원(內院禪院)으로부터 조실로 와 달라는 초청장을 받고 거기에 가 젊은 선승들과 더불어 5~6년의 세월을 보냈다. 1920년 봄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고향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홀로 앉아 보림(保任)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에 홀로 앉아 불을 지피다 또다시 머리가 열렸다. 그 깨달음이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 있을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으나 다만 한줄기 활로가 분명해졌을 뿐이다. 때는 한암의 나이 35세 되던 겨울이었다. 그는 다시 읊었다.

着火廚中眼忽明 

從玆古路隨祿淸  

若人問我西來意 

岩下泉鳴不濕聲  

부엌에서 불붙이다 별안간 눈 밝으니

이걸 쫓아 옛길이 인연 따라 분명하네.  

날 보고 서래의를 묻는 이가 있다면 

바위 밑 우물 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村狵亂吠常疑客

山鳥別鳴似嘲人

萬古光明心上月

一朝掃盡世間風

마을 개 짖는 소리에 손님인가 의심하고 

산새의 울음소리는 나를 조롱하는 듯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하루아침에 세상 바람을 쓸어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