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찬주
2022-09-14 (수) 08:46염라대왕 편지를 받다
정찬주(소설가)
마중물 생각
차례를 지내기 전의 차례상를 보고 잠깐 상념에 잠긴다. 목기가 없고 상 앞줄 오른쪽 배가 놓일 자리에 귤이 있어 의아해하는 가족이 있다. 어제 위채창고 문을 열어보니 무언가 허전했다. 유심히 살펴보니 돌아가신 선친께서 장만한 수십 년 된 제사용 목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창고 안 환기를 위해 여름철에 문을 열어놓곤 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와 아내는 상상력까지 동원하면서 몹시 아쉬워했다. 나는 어머니를 위로할 겸 수명이 다해서 없어졌으니 잊어버리자고 설득했다. 무엇이든 간에 생로병사가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목기 대신 도예가인 아내가 만든 접시를 이용해 진설했는데 정성이 드러나보여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내친김에 앞으로는 아내가 만든 도자기 그릇으로 목기를 대신하기로 했다.
또 하나, 허물은 배를 진설하지 못한 점이다. 그것은 순전히 내 실수였다. 배와 사과, 포도, 생선 등 추석선물이 들어오는 대로 이웃 농부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아내가 놀란 채 '여보, 배가 없어요!'하고 추궁하듯 말했을 때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셨으니 오히려 뜻 깊은 추석이 될 거라고 변명했다. 다행히 아내는 내 실수를 이해해주었다. 그래서 배 대신 제주도산 큰 귤이 차례상에 올라간 것이다. 조상님께 차는 보관해두었던 2008년산 보이차를 꺼내서 우려 올렸다.
어머니와 아내, 두 동생과 두 조카와 함께 차례를 지내고 나서 거울을 보니 흰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띈다. 흰 머리카락을 선가(禪家)에서는 염라대왕 편지라고 하는데 맞는 말 같다. 어느 새 내 나이도 칠십을 넘었다. 인생무상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말씀과 침묵
내 법은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함이 없이 말하고,
닦음이 없이 닦는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에게는 가깝지만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갈수록 아득할 뿐이다.
무어라 말할 길이 끊어졌으며,
사물에 걸릴 것이 없으니,
털끝만치라도 어긋나면 잃기도 잠깐이다.
천지를 볼 때 덧없이 생각하고,
세계를 볼 때도 덧없음을 생각하며,
마음을 볼 때는 그대로가 보리(菩提)라고 생각하라.
이와 같이 도를 알면 얻기가 빠를 것이다.
몸 안에 있는 사대(四大)가 제각기 이름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나’가 없다고 생각하라.
내가 있지 않다면 그것은 허깨비와 다를 게 무엇인가.
사람이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명예를 구하지만
명예가 드러날 만하면 몸은 이미 죽고 만다.
하잘것없는 세상의 명예를 탐하느라
도를 배우지 않고 헛수고만 하니,
마치 향을 사루어 그 향기를 맡기는 했지만
향은 이미 재가 되고 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을 해치는 불이 명예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부처님께서 어떤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 있느냐?”
사문이 대답했다.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너는 아직 도를 모른다.”
부처님께서 다른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 있느냐?”
“밥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너도 아직 도를 모른다.”
또 다른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 있느냐?”
“호흡하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렇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갈무리 생각
차례상의 음식 중에 차를 먼저 음복한 뒤 철상(撤床)하면서도 느낀다. 향을 사루어 연기를 내는 까닭이 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는 “조상님은 향을 맡고 연기를 보면서 집에 드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조상님과 산 사람과의 매개체가 연기라는 말씀이었다. 소반에 올라있던 아내가 만든 백자연꽃 향꽂이에 세 개의 향이 어느 새 재로 변해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하잘것없는 세상의 명예를 탐하느라
도를 배우지 않고 헛수고만 하니,
마치 향을 사루어 그 향기를 맡기는 했지만
향은 이미 재가 되고 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을 해치는 불이 명예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간에 진리를 구하는 마음(菩提心)만은 잃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향기만 맡는 사람이 되지 말고, 향기 그 자체가 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목숨은 호흡하는 사이에 있을 뿐이다. 염라대왕 편지를 받고 추석날 오후에 이와 같은 ‘갈무리 생각’으로 답장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