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심이 곧 여래다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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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마중물 생각

 족자를 선물 받았다. 서울에 계시는 운당 정영채 노서예가께서 자작 한시(漢詩)를 쓰시고 나서 나와 잘 어울린다며 보내주셨다. 노서예가 선생님께서 나에게 족자를 보시한 셈이다. 힘이 넘치는 초서인데 누가 80대의 서예가라고 하겠는가? 

  晝行綠水聲中路

  夜宿靑山影裏家

  그러고 보니 낮에 개울가를 산책하고 밤에는 산 그림자 속에서 잠자는 내 일상을 노래하는 시 같다. 한시를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낮에는 푸른 물소리 들으며 산길을 걷고

  밤에는 청산 그림자 속 집에서 잠잔다네.

 시를 볼 때마다 마음이 충만해진다. 값을 부를 수 없는 솔바람처럼 마음의 선물이기 때문에 가치를 따질 수 없을 것 같다. 노서예가님의 자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보살행인 육바라밀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보시가 왜 으뜸인지 이해가 된다.

 부처님 말씀과 침묵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를 하는 것은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속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했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내거나 은혜 갚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보시를 할 때에는 자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받은 사람을 가려서도 안 된다. 그가 계행이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거나, 선지식이거나 선지식이 아니거나 따져서는 안 된다. 보살이 만약 보시 받을 사람의 계행이나 그 결과를 따진다면 끝내 보시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보시하지 않으면 보시바라밀다를 갖출 수 없고, 보시바라밀다를 갖추지 못하면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에는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해야 한다. 병든 중생을 보면 부모가 병든 자식을 대하듯 가엾이 여겨 보살펴 주고, 즐거워하는 중생을 보면 병든 자식이 다 나은 것을 보듯 기뻐하고, 보시한 뒤에는 다 큰 자식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듯이 해야 한다.

보살이 자비스런 마음으로 음식을 보시할 때에 다음과 같이 서원을 세워야 할 것이다.

‘지금 나의 보시는 중생에게 함께 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중생 모두가 큰 지혜의 음식을 얻으면 좋겠나이다. 중생이 법으로 맛있는 음식을 삼고 애욕의 음식을 찾지 말기를 바라나이다. 중생이 지혜를 완성하여 걸림 없이 착한 일을 성취하면 좋겠나이다. 중생이 공空한 이치를 깨달아 허공과 같이 걸림 없는 몸을 얻으면 좋겠나이다. 중생이 자비심을 일으켜 복밭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모든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한량없는 선행善行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이 모든 선행의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자비심은 진실해서 헛되지 않고 선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은 곧 자비심이며, 자비심은 곧 여래다.”

― 『열반경涅槃經 범행품梵行品』

 갈무리 생각

 올해는 절기가 빠르게 다가온다. 마당가 토종 옥잠화는 백중 전후에 피었는데, 올해는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에 피어 있다. 선가에서는 하안거를 해제하는 백중 전후에 핀다고 해서 옥잠화를 해탈꽃이라고도 부른다. 

 내 산방 부근 절에 한 스님이 여름을 보냈다. 건강이 안 좋아 선방에 방부들이지 않고 부근 절에서 여름을 난 것이다. 절 연못에 잉어나 원앙이 날아오면 스님이 먹이를 주곤 했는데, 앞으로는 누가 줄지 궁금하다. 그 시간이 마침 아내와 나의 산책 시간이어서 스님과 목례를 나누면서 은근히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스님의 자비로운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원앙새들도 스님이 떠날 줄 알았을까? 원앙 새끼 두 마리와 어미 한 마리가 어느 순간부터 연못에 날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젯밤에 나는 스님을 내 산방으로 초대해서 차담을 나누었다. 건강을 회복하셨는지 내일 용화사 선방으로 간다고 하신다. 나는 아내의 동의하에 한 달 생활비 일부를 떼어서 스님에게 ‘갑자기 병원 가실 일이 생기면 사용하시라’고 봉투를 드렸다. 여유가 있어서 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님과 헤어진 뒤, 아내와 나는 부자가 돼서 보시를 많이 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소망을 얘기하고는 웃었다. 왜 웃었을까? 그런 날이 오기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시간은 흐르고 옥잠화는 또 지고 말겠지. 무심히 피고 지는 옥잠화야말로 나에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문 <금강경>으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이고 산스끄리뜨어 <금강경>으로는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을 내라’라는 뜻이다. 설산의 눈처럼 깨끗한 옥잠화가 무심히 피고 지듯 아무리 좋은 무엇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했다는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