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살인가?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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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마중물 생각

이웃 절 운주사에 다녀왔다. 탑의 석질을 보니 퇴적암이다. 퇴적암은 화강암과 달리 무른 것이 특징이다. 조각하기에 편한 것이 장점이지만 정교한 음각이나 양각을 할 수 없다는 게 단점이 아닐까 싶다. 목포나 해남 바닷가에서 배로 실어 영산강을 거슬러 온 듯하다. 아래 절 쌍봉사 철감선사 사리탑과 대비된다. 화강암인 사리탑의 조각은 천년 전에 사실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천녀, 배흘림기둥, 극락문의 문고리, 피리, 장구, 서가래 끝의 연꽃 문양, 암막새 수막새 등등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주사 탑과 돌부처님들은 투박한 민중의 비원을 드러내고 있는 듯해 정겹고 친숙한 느낌이 든다. 일주문 가까이에 서있는 돌부처를 거지(동냥치)부처라고 하니 애잔하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거지부처 위 산자락에는 거지(동냥치)탑도 있다. 동낭치란 우리 고장에서 동냥하는 거지를 말하는데, 운주사에서는 동냥하는 밑바닥 인생도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된다고 하니 얼마나 거룩한가. 운주사의 거지부처와 거지탑에서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를 눈 속의 눈으로 다시 본다.

부처님 말씀과 침묵

음식을 받았을 때는 마치 약을 먹듯 하고, 

좋고 나쁜 것을 가려 생각을 팔지 말며, 

건강을 유지하여 주리고 

목마름을 달래는 데에 맞도록 하라. 

마치 꿀벌이 꽃을 거쳐 올 때 

꿀 만들기에 적당한 꽃가루만을 취하고 

빛깔이나 향기는 다치게 하지 않는 것처럼, 

수행자도 남의 공양을 받을 때는 주림을 달랠 정도만 받고, 

많은 것을 구해 그 착한 마음을 헐지 마라. 

지혜로운 사람은 소의 힘이 얼마만 한가를 헤아려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그 힘을 다하게 하지 않는다.

                                                ― 『유교경遺敎經』

  보살이 임자 없는 꽃이나 향을 볼 때 

  혹은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를 보더라도 

  그것을 부처님께 공양하며 발원한다. 

  ‘이 선근 공덕으로 일체중생이 지혜를 갖추어지이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은 시방세계 중생이 누리는 온갖 즐거움을 보면, 

  일체중생이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만약 고통 받는 것을 보면 중생을 위해 모든 죄를 참회하고, 

  중생의 고통을 모두 내가 대신 받아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받도록 원한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마침내는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만을 누리기를 원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 『보적경寶積經 대승방편품大乘方便品』

  마중물 생각

 난 선물을 받았다. 경기도에서 난 전문 화원을 하는 강경원 박사가 풍란(소엽풍란), 나도풍란(대엽풍란), 석곡(노란 잎에 푸른 줄무늬란)을 택배로 보내온 것이다. 강 박사는 내가 향헌(香軒)이라고 호를 지어준 분이다. 옛 선비들은 난이 꽃피면 친구를 불러 술을 마셨는데, 그 술을 난주(蘭酒)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술을 끊은 지 오래된(그때를 나는 전생 혹은 B.C시대라고 부른다) 나는 난향기 속에서 차를 마시고 싶다. 꽃이 핀 풍란은 거실 창가에 두었다. 햇볕을 봐야 향이 오래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밖에 난들은 소나무 가지 사이에 살짝살짝 얹혔다. 겨울이 되면 방으로 들이기 위해서다. 작년 여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며 겨울에도 소나무에 가지에 단단히 붙여두었다가 불행하게도 모두 동사했던 것이다. 

 마당가 옥잠화는 부지런히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다. 녀석에게 퇴비를 주고 가끔 물을 주었더니 꽃으로 응답한다. 산방을 찾아온 손님들이 감탄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나누는 대화를 밀어(密語)라고 하던가? 그러나 나는 말 없는 식물과 대화하는 것이 더 좋다. 산방의 난과 옥잠화가 보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님들에게 조건 없이 공평하게 꽃을 보여주고 향기를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