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붓다
mediabuddha@hanmail.net 2022-07-13 (수) 18:18김방부사와 증심사 오백나한 이야기
나한이란 아라한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여래십호 부처님을 호칭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뜻으로는 살적. 응공. 무학으로 옮긴다. 살적이란 번뇌의 적을 물리친 위대한 승리자란 뜻이다. 응공이란 중생들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고, 무학이란 번뇌가 모두 지혜로 바뀌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깨달은 존재라는 뜻이다.
아라한을 오백 분 모신 전각을 오백전이라 부른다. 오백나한에 대한 전설은 몇 가지가 있는데 모두 오백도둑이 발심해서 나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바라나시에 대부호의 부인이 여종에게 집을 맡기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갔다. 그날은 마침 보름날이었다. 그때 오백명의 도둑이 쳐들어 왔다. 여종을 기둥에 묶고 재물을 훔쳐 수레에 실었다. 몇개의 창고를 터니 수레에 가득 재물이 쌓였다.
여종은 손을 비틀어 밧줄을 풀고 마나님께 뛰어가서 도둑이 재물을 훔쳐가고 있다고 일렀다. 도둑들도 여종이 달아난 것을 알고 뒤를 쫒게 하였다. 설법을 듣던 부인이 조용히 말하였다. 지금 부처님 설법이 진짜 보물이다. 집안에 있는 것은 설법에 비하면 휴지조각이나 쓰레기 같은 것이다.
도둑이 그말을 엿듣고 대장에게 보고 하였다.
“대장님. 우리가 훔친 것은 휴지라고 합니다. 진짜보석은 저쪽에 있다고 합니다.” 오백도둑들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는 모두 그 자리에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들이 사람들의 번뇌를 훔쳐가는 성자 아라한이 된 것이다.
조선 세종 때 광주부사를 지낸 김방은 불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경양방죽을 만들다가 큰 개미집에 수 만 마리의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공사 중에 죽을 개미들을 개미집 채로 무등산 장원봉으로 옮겨 주었다.
그 뒤로 인부들을 먹일 식량이 떨어져 일이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양식 창고에 쌀이 가득 쌓여 있었다. 수많은 개미떼들이 쌀을 물고 오는 것이었다. 개미들의 도움으로 경양방죽을 완성할 수 있었다.
김방 부사는 지역민들의 평안과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무등산 증심사에 오백나한을 모시기로 발원하고 오백전 불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사를 절반쯤 하다가 병이 들어 몸져눕게 되었다. 한의가 진맥을 하더니 부사님 병은 닭똥집을 먹어야 낳는다고 하였다.
불사 중 목욕재계하고 육식을 금하던 김방은 병을 낳기 위한 약으로 닭똥집만 먹고 고기는 인부들에게 먹게 하였다. 오백전 짓기 위해 닭들이 희생되자 닭들이 비상회의를 열고 임금께 상소하기로 하였다. 세종대왕의 꿈에 오백 마리의 닭이 나타난 것이다.
'대왕님 지금 광주에 김방이란 자가 역모를 꾸미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으니 잡아다가 참수하소서.' 꿈에서 깨어난 세종은 금부도사를 불러 군사를 데리고 가서 김방을 잡아 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또다시 뚜렷한 꿈을 꾸었다. 이제는 오백명의 동자승들이 나타났다.
'대왕님께서는 영민하신데 어찌 축생인 닭의 말에 현혹되십니까? 김방 부사는 대왕님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오백전 불사를 하고 있습니다. 속히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세종은 급히 파발마를 보냈다.
먼저 떠난 금부도사는 증심사 입구 배고픈 다리에 이르렀을 때 말도 사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배고픔을 참으며 다리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에 세종이 보낸 파발마가 도착하여 명을 거둔다는 어지를 보여주었다.
그때에야 말과 사람이 움직일 수 있었다.
증심사 입구 배고픈 다리와 선거리의 유래는 이때 생겨난 것이다. 지금은 다리를 확장하여 홍림교로 바꿔 부르고 있다. 역사를 소홀히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은 홍림교 옆에 배고픈 다리 역사의 기록하나 남기지 않고 있다.
증심사 오백전은 무등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이다. 김방이 개미들의 보은과 닭들의 희생으로 건축된 오백전은 정유재란으로 불타 사라졌다. 광해군 원년에 석경. 수장. 도광 스님에 의해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도 광주 설화 속에서는 닭들의 말을 듣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다. 또 무고한 사람을 잡아 참수하려는 권력을 꼼짝 못하게 하는 성난 민심이 설화 속에 깃들어 있다.
배고픈 다리가 홍림교로 불린 이야기
증심사 입구 배고픈 다리주변 옛적 모습.
배고픈 다리가 낡아 홍림교를 새로 건설할 때이다. 인근에 살던 유학자 이백순옹이 다리 부근 암벽에 다리 이름의 유래를 밝혀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동사무소에 알렸다고 한다.
이글로 해서 이 마을이 홍림마을이 되고 배고픈 다리는 홍림교가 되었다.
암벽에 써진 글씨는 다음과 같다.
방제 이도선생 효감비
주호읍간설천
홍임빙이오출
눈오는 하늘을 보며
부르짖고 우니
무지개가 뜨고 얼음이
깨지며 자라가 나왔다.
옛날 이씨성을 가진 효자가 어머니의 병환을 낮게 하려고
백방으로 약을 구했다. 배고픈 다리에 이르러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니 하늘에 무지개가 뜨고 얼음이 깨지면서 자라가 나왔다. 그 자라를 잡아 약을 해드렸더니 어머니의 병환이 낳았다. 효심을 일깨우는 이렇게 중요한 역사기록도 이 나라 행정에서는 묻어버리기 일쑤다. 다리공사하면서 암벽을 파손해 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도로 지번 변경으로 오천년 역사의 얼이 담긴 지명을 아무 뜻도 없는 숫자로 바꿔버렸다. 홍림교다리 건설에 장애가 되지 않은 암벽까지 파괴해 버린 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새로 건설된 홍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