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이고 누가 나인가 

경허가 만년 10년 가까이나 떠돌며 보내던 열반지(涅槃地)는 북녘땅 끝 함경도 삼수ㆍ갑산ㆍ강계 지방 일대였다. 회갑 노년기의 경허가 강계 땅을 지나던 때는 1905년 무렵이었다. 강계군 종남면 한전동의 시골 선비 김탁은 경허보다 세 살 아래인 54세였다. 지방 유지였던 김탁은 마침 고향 마을에서 10여 리 떨어진 들판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속인이라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스님이라 보기도 어려운 한 초로의 늙은이를 에워싸고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런 놈의 영감은 죽여도 그만이야! 나쁜 영감태기 같으니라고!”

청년들의 살기가 등등했다. 이유인즉 매를 맞고 있는 사내가 아낙네를 희롱했다는 것이었다. 김탁은 청년들의 무지막지한 폭행부터 뜯어말렸다. 김탁 덕분에 경허는 청년들로부터 그나마 심각한 봉변을 덜 수 있었다. 그때였다. 경허가 일갈했다.

“미친놈이, 할 일이 없으면 그대로 길이나 갈 것이지, 괘씸하구나! 네 이놈, 이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너는 남의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어찌 삯 싸움이나 하며 쓸데없는 참견을 하려 드는고?”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욕설 섞인 호령부터 하는 경허를 보자 김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탁은 안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달래며 경허의 얼굴과 행색을 다시 눈여겨보았다. 범상치 않았다. 뭔가 달랐다.

“이거 어른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저희 집 누처로 가시겠습니까?”

그제야 화가 누그러진 경허는 김탁의 뒤를 따랐다. 길을 걸으며 경허는 김탁과 법담을 나눴다. 집에 돌아와서도 밤새는 줄 모르고 그날 밤을 밝혔다. 경허의 일거일동에 취한 김탁은 경허를 깍듯이 받들어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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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헐각(老僧歇脚):노승이 다리를 쉬다’는 조영석(趙榮, 1686~1761) 

모두 꿈속의 일이로다

반도의 최북단 유배의 땅. 그곳에서 경허는 유생 박난주(朴蘭洲)로 살았다. 머리를 기른 것은 일제의 단발령에 대한 단호한 저항이었고, 유생이 된 것은 서당을 열어 장차 나라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까막눈으로는 무명을 벗어날 수 없고, 글을 배우지 않으면 영원히 일본과 못난 조선의 위정자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이다. 산문에서 도인을 배출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절실한 것이 까막눈에서 중생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중생들을 교화 제도시키는 한편 선비들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술과 시로 세상 시름을 잊으며 말년을 보냈다. 그에게는 고향이니 타향이니 하는 구분은 물론, 구태여 차안(此岸)이다 피안(彼岸)이다 하는 구분도 없다. 다음은 이때 그가 쓴 시다.

病酒伊來將忘國  

訪仙是處更爲邦 

淸簞淡蔬堪足慰  

欲忘京洛舊心腔

병들고 술 취해 나라 걱정 잊나 했더니 

신선 찾던 이곳 또한 나라일세. 

조촐한 도시락과 담박한 나물로 위안을 삼으며 

서울(京城)을 잊고자 하는 옛 마음 그대로일세.

그가 행방불명이 되자 맏상자인 수월이 평안도 묘향산의 한 암자에 머물며 스승의 행방을 애타게 수소문하고 다녔다. 경허가 삼수갑산에 들어박혔다는 것을 알아낸 수월은 수백 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가 서당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짚신을 보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분명 스승 경허의 짚신이었다. 그러나 경허는 방 안에서 문고리를 걸어 닫고 말했다.

“나는 스님이 찾는 사람이 아니오.”

방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경허는 제자 수월임을 알고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돌려보낸 것이다. 그 스승의 그 제자. 수월은 스승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스승을 위해 짚신 한 켤레를 정성 들여 삼아 놓은 뒤 멀리서 삼배를 올리고 발길을 돌렸다. 훗날 수월도 스승처럼 만주로 흘러들어가 나라를 잃고 떠도는 조선 민초들에게 짚신 보시를 하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경허는 1912년 4월 병든 몸을 이끌고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온다. 조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것을 한탄하며 백두산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래고 돌아온 바로 그 달 하순, 갑산의 웅이방 도화동이라는 춥고 외로운 땅에서 다시 바람이 되었다. 다시 구름이 되었다. 그가 임종 직전 일원상(一圓相)을 그린 다음, 그 위에 써놓은 열반게(涅槃偈)다.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 달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훗날 중국으로 망명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김탁이 법구를 수습해 유교식으로 장례를 모셨다. 그의 부음 소식이 충청도 정혜사에 있던 만공에게 전해진 것은 일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만공은 사형 혜월과 함께 달려가 다비식을 거행한 다음 분골된 재는 경허가 술과 시로 외로움을 달래며 떠돌던 갑산의 강과 산 그리고 봄이 오지 않는 빼앗긴 들녘에 뿌렸다. 다음은 그의 오도가 중 한 구절이다.

誰是孰非  

夢中之事 

北邙山下  

誰爾誰我 

누가 옳고 그른가 

모두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 아래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인가 

그는 미친 여자와 잠자리를 하면서 뜨거운 자비를 나누었고,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침식을 할 만큼 미추(美醜)를 초월해 있었다. 갯마을 처녀를 사랑하고 정을 나눈 후 짐승처럼 뭇매를 맞고 실신한 후 삼일 만에 깨어나서는 파도 소리가 높고 바람이 거칠더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였다. 또 스스로 오물 속에 빠져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지옥의 삶을 살기도 하였고, 축생과 아귀의 세계로 자기를 몰락시키는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운수적(雲水的) 고독을 참지 못해 초동들을 불러 돈을 주면서 자기를 때리도록 했고, 물동이를 이고 가는 처녀에게 입맞춤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배 위에서 뱀들이 똬리를 틀게 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