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마음속에 일주문을 세우세요   

오월 내내 이어진 가뭄을 풀어낼 비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린 비가 보슬보슬 내리다 굵은 빗발로 바뀌더니 그쳤고, 그러다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우산 접고 펴기가 귀찮았지만 내려주는 비가 고마워서 옷이 젖더라도 그냥 맞아주었습니다. 

더구나 ‘망종에 날씨가 궂거나 비가 오면 그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으니, 농사를 짓는 분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골목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행선지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봉원사입니다. 

찾은 날짜는 6월 6일 현충일, 절기상으로는 망종입니다.

차량 출입을 통제하는 차단기가 설치된 곳에 경고문이 걸렸습니다.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금잡인(禁雜人)”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감을 들인 한지 위에 쓰였고, 그 좌우에도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글자가 걸렸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금잡인”과 같은 내용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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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엔 일주문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세속에서 지녔던 번뇌를 일주문에 들어서면서 두부 자르듯 쉽게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겁니다. 또한 마음이란 것이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바뀌는 것이어서, 자신의 마음을 바로 잡지 않는 한 백 개의 일주문이 세워졌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속적인 것과 부처님의 세계가 마음속에서 결정되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보면, 일주문은 마음속에 세워져 있어야 할 겁니다. 어쩌면 사바세계 곳곳에 일주문이 세워져 있는데, 우리의 눈이 못 보고 있을 따름이라 생각하면서 걸었습니다.

날씨 좋은 날을 제쳐놓고,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음에도 봉원사를 찾은 까닭은 이곳 봉원사가 펼치는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재” 시연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영산재는 현충일을 맞추어 우리나라 전몰장병 영혼의 극락왕생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고 전쟁의 종식을 기원을 담아 봉행되기에 비 맞는 것쯤은 달갑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나는 발심한 때가 있는가?

봉원사는 영산재 봉행을 앞두고 도량 안팎을 한지(장지)에 천연염료로 물들여 제작한 번(幡)으로 아름답게 장엄하였지만, 아쉽게도 종이번은 단비와 함께 몰려든 바람에 찢겨지고 떨어졌습니다. 비바람이 여러 스님들이 정성을 다해 마름질하고 채색하고 글을 썼을 터인데, 그 공을 모르는 채 한 것입니다.

스님들이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하려 한 경건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주려고, 떨어진 번을 주워서 담장과 낮은 축대에 걸쳐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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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경과 능엄경이란 경전 이름과 법성게 일부가 쓰였습니다. 미타경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서쪽 불국토에 아미타불이 지금도 설법하고 계시며, 중생들이 그 정토에 가려면 어떻게 발원해야 하고,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경전의 이름입니다. 아미타경과 능가경만이 아니라, 땅바닥에 흩날리는 종이 번에는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수많은 경전의 이름이 써졌을 겁니다. 공중에 종이 번을 건 까닭은 부처님의 법문이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축대에 올려놓은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是故行者還本除 叵息忘想必不得”은 ‘처음 발심한 때가 바른 깨침을 이룬 때이니,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있지도 않은 망상을 끊어내겠다는 생각조차도 일어나지 않아야 얻을 수 있다’로 해석해 봅니다.(저의 해석이 틀렸더라도 ‘너무 어려운 탓이려니’하시며,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성게가 30구로 이루어졌으니, 떨어져 나뒹구는 번을 주워 모으면 전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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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길옆에 부도와 송덕비가 보였습니다. 천년고찰로 불리는 봉원사는 태고종 총본산이니만큼 그동안 많은 대덕스님께서 주석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도는 종 모양으로 단순하여도 불탑과 마찬가지로 탑신부와 위아래에 상륜부, 기단부를 지닙니다. 탑신부의 종 모양을 이룬 곡선과 위쪽의 연꽃봉오리, 아래쪽 뒤집힌 연꽃잎 디자인이 석공의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천왕이 지물을 들고 있는 이유는

보이지 않았던 일주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만났습니다. 일주문이 보이지 않았지만 천왕문을 세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천왕문에서 버티고 선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왕천(四王天)의 주인으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선혜보살(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 흰 코끼리의 모습으로 도리천을 떠나 마야 왕비의 태속으로 들 때, 사천왕은 부처님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사천왕의 모습이 크고 험악하게 표현되었지만, 이는 도량을 보호하고 불자들을 지키기 위한 방편일 뿐, 우리들이 두려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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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은 동서남북 각 방향에서 비파로 연주하여 중생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 여의주로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게 하고, 무수한 번뇌를 칼로 끊어 지혜가 늘어나게 하고, 불탑으로 부처님의 법문이 전해지게 합니다. 이들이 비파와 여의주 등의 지물을 들고 포즈를 잡은 것은 중생을 위해 언제까지라도 보살펴줄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중생과 같이 살아가는 16나한님 

몇 걸음 걷지 않고, 16나한상을 만났습니다. 나한은 아라한으로 온갖 번뇌를 끊어서 중생들에게 공양을 받을 만하고, 지혜로 번뇌를 없애며, 오래도록 죽지 않는 깨달은 사람입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천이백 아라한 중 열여섯 분은 수행을 통해 천안통, 천이통, 신족통 등 무궁한 능력을 지녔고,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불법을 지키면서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촉을 받은 분들입니다. 부촉 받은 말씀을 지켜내느라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면서 사바세계 중생과 같이 살아가는 때문인지, 표현된 얼굴이 우리들의 평상시 모습과 같아서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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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옆 사람을 보게나. 너만 그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니야’, ‘ 어유, 저걸 그냥’ 등. . . 100년 전에도, 지금도, 100년 1000년 후에도 중생들 모두가 짓게 되는 표정입니다.

다음에 봉원사를 찾아 한 분 한 분의 표정을 보면서, 나름대로 어떤 상황에서 짓게 되는 표정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신체 표현도 재미있습니다. 미륵부처님이 출현할 때까지 스스로 수명을 연장하는 바람에 한없이 길어진 눈썹, 중생들의 소원은 물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기 위해 커진 귀, 지혜가 들어차다 못해 밖으로 삐져나온 정수리와 앞이마, 너무 오래 앉아 수행하다 보니 나무와 붙어버렸음 등을 나타냈습니다.

구룡과 수레바퀴만큼이나 큰 연꽃

대방(大房)으로 향한 길에서 도량 뒤편의 낮은 산에서 나오는 약수를 받는 석수조가 있고, 그 옆에는 청동으로 조성된 구룡(九龍)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월 초파일 해가 뜰쯤에 마야부인의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옆에는 수레바퀴만큼이나 큰 연꽃 일곱 송이가 피어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곳 무우수 아래에서 ‘나는 일체의 천상과 인간 중에서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도다. 한량없는 나고 죽음을 이제야 다하였다니, 이 생(生)에 일체의 사람과 하늘들을 이익 되게 하리라.’고 외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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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부처님을 곁에서 보호하는 사천왕이 하늘의 비단으로 부처님의 몸을 감쌌고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그대로가 봉원사 마당에 조성되었습니다. 도량에 조성된 모든 것이 경전을 따른 것이고, 허투루 놓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