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은가?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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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 윤경

 마중물 생각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나는 세 분의 스승을 둔 행운을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부탄에 여행 갔을 때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 한 분의 수행자를 스승 삼아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참으로 지혜롭고 아름다운 전통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첫 스승은 돌아가신 아버지이다. 아버지께서는 사춘기 때 내가 가출한 뒤 돌아오자, 입고 있던 겉옷을 벗게 하시더니 마당가에서 그 옷을 태우라고 하셨다. 그때 하신 말씀은 “이제 너는 어제의 네가 아니다.”였다. 방황을 멈추게 한, 천둥 같은 그 말씀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문학의 스승은 문학평론가이자 전 동국대총장 홍기삼 문학박사님이다. 대학시절 내가 아팠을 때 약을 구입해 대주시고 소설습작을 써서 댁으로 찾아가면 사모님께 전복죽을 끓여주라고 부탁하셨다. 지금도 나는 십수 년째 명절이나 스승의 날이 되면, 하고 많은 선물 중에 선생님 댁으로 전복을 보내드리고 있다.

 불문(佛門)의 스승은 입적하신 법정스님이다. 스님께서는 나를 불일암에서 하룻밤 재웠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스승과 제자의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삼배를 받으신 뒤 ‘저잣거리에 살되 물들지 말라’고 무염(無染)이란 법명과 계첩을 주셨다. 그때 오계를 받은 공덕을 짧게 법문하셨는데, 오계란 신호등 같아서 내가 실수하거나 허물이 생길 때 ‘빨간 불’이 켜질 거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한 분의 스승만 살아 계신다. 홍기삼 박사님은 나와 용띠 띠동갑으로 올해 83세이시다. 나에게 고원한 문학정신이 무엇인지를 학창시절에 알려주셨고, 지금도 때때로 문학적 영감과 정신적 긴장을 주시는 분이다.

 오늘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자, 자네도 이제 칠십이 넘었으니 원로(元老) 작가라고 말씀하여,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원로작가가 되겠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그런 뒤 나는 “갈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한, 먼 길에 있는 작가이므로 원로(遠路)작가입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 허허허 웃으시었다.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생각할 때 나야말로 원로(遠路) 작가임이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부처님 말씀과 침묵

남 듣기 싫은 성낼 말 하지 마라.

남도 그렇게 네게 답할 것이다.

악이 가면 화는 돌아오나니

욕설이 가고 오고 주먹이 오고 가고.

소치는 사람이 채찍으로써 

소를 몰아 목장으로 돌아가듯

늙음과 죽음도 또한 그러해

사람의 목숨을 쉼 없이 몰고 가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쉼 없이 타고 있는데

그대들 어둠 속에 덮여 있구나.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보라, 이 부서지기 쉬운 병투성이 

이 몸을 의지해 편하다고 하는가.

욕망도 많고 병들기 쉬워

거기엔 변치 않는 실체가 없네.

목숨이 다해 정신이 떠나면

가을철에 버려진 표주박처럼

살은 썩고 앙상한 백골만 뒹굴 것을

무엇을 사랑하고 즐길 것인가.

사람이 만일 바른 법을 모르면

그 늙음은 소의 늙음과 같다.

한갓 자라나 살만 더할 뿐

하나의 지혜도 더한 것 없나니.

깨끗한 행실을 닦지 못하고

젊어서 재산도 쌓지 못하면

고기 없는 빈 못을 부질없이 지키는 

늙은 따오기처럼 쓸쓸히 죽는다.

깨끗한 행실도 닦지 못하고

젊어서 재산도 쌓지 못하면

못 쓰는 화살처럼 쓰러져 누워

옛 일을 생각한들 어이 미치랴.

사람이 만일 자신을 사랑하거든

모름지기 삼가 자기를 지켜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 세 때 가운데

적어도 한 번쯤은 자기를 살피나니.

원래 자기가 지은 업이라

뒤에 가서 언젠가는 스스로 받는다.

자기가 지은 죄는 자기를 부수나니

금강석이 보석을 부수는 것처럼.

악한 일은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행하기 쉽다.

착한 일은 나를 편안케 한다.

그러나 그것은 행하기 어렵다.

물거품 같다고 세상을 보라.

아지랑이 같다고 세상을 보라.

이렇게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은

염라왕을 만나지 않는다.

                                       ― 『법구경法句經』

갈무리 생각

마당가 5평 남짓 크기의 연못. 동그란 수련 잎이 한창이다. 홍련과 백련이 서로 합창을 하듯 한 송이씩 피었다. 백련은 지혜를, 홍련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꽃 같다. ‘옴 마니 반메  훔’이란 진언은 산쓰끄리뜨어로 직역하자면 ‘어머니의 태(생명의 근원)가 보배롭고 홍련처럼 고귀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내 식대로 의역하자면 ‘어머니의 태’는 모든 생명을 기르는 대지, 즉 관세음보살의 한없는 자비가 될 터이다. 

작품이 잘 안될 때 나는 연못을 들여다보곤 한다. 무심코 그러다 보면 찾던 답이 떠오르곤 한다. 연못이 때때로 나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니 연못은 나에게 더 없이 고마운 존재다. 

이 집에 사는 이 누구인고? 나를 자애롭게 받아준 집이 새삼 고맙다. 화단에 핀 수국꽃, 함박꽃, 창포꽃이 나를 환대하는 것 같아 황공하기까지 하다. 나라고 하는 나를 비우고 나니 도처에 고마운 존재들뿐이다. 나를 배고프지 않게 하는 밥이 고맙고, 나를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 고맙다. 밤에는 나를 춥지 않게 덮어주는 이불이 고맙다. 이처럼 내가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나를 고집하지 않는, 무아(無我)를 받아들이는 동안에는 세상과 다툴 일이 없다. 온전히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