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허와 그의 제자들

경허와 그 제자들4

우 봉규 | | 2022-05-24 (화) 00:51

하늘을 보다 


 “경허 스님에 관한 흔적은 청계사에 아무것도 없어요. 뭐 워낙 어릴 때 있었으니까. 이따금 무슨 연구소나 불교잡지에서 찾아오곤 하지만 그때마다 할 말이 없어요. 단지 지금의 극락보전에서 기거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

 청계사에 거하는 젊은 스님은 난처한 듯 웃었다. 그러나 진정한 경허의 흔적은 대웅전이나 요사채, 그가 기거했다는 극락보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청계사에서 내려다보는 저 산줄기, 그 산줄기를 넘어가는 구름과 몰려드는 바람 그리고 절 뒤꼍에 서 있는 늠름한 소나무와 키 작은 산죽들 사이에 있는 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또 다르게 변한 청계사. 사실대로 표현하자면 절이 아니라 약수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청계 종점에서 절까지 오르는 동안 겨우 겉치레로 아스팔트를 깐 좁은 도로에는 쉴 새 없이 차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절을 찾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도 잠깐. 청계사 아래 돌계단에 도착했을 때는 전부 물통의 천지였다. 예상했던 대로 옥수 같았던 극락보전 앞의 물은 말라 있었다. 물을 찾는 중생들을 위해 절마당의 물을 바깥으로 빼준 스님들의 자비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이름대로의 청계사는 이제 없는 것이다.



조영석(趙榮祏)의 ‘노승탁족도’, 18세기, 비단에 담채, 14.7 × 29.8cm, 국립중앙박물관



 경허가 물짐을 지고 나무를 했을 뒷산에 올랐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원효도 마찬가지였지만 경허 또한 태양같이 밝은 이면에 그만한 그림자를 우리 불가에 드리워 놓았다. 수많은 허울승들이 그들의 기행(奇行)을 모방해 지금도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고 있는 현실. 원효와 경허의 만행이 어째서 인구에 회자되는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원효와 경허는 그들 자신의 욕망으로 하여 기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들의 파격 뒤에는 불타는 구도 의지와 대중을 향한 뜨거운 애정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버린 이름, 그러나 언제까지 살아있는 이름. 오로지 서울 중심으로만 형성된 6백 년 조선의 잘못된 정신문화가 그래도 이만한 요량을 갖춘 것은 전국 각지의 수많은 사찰 그리고 그 사찰 속에 원효와 경허 같은 무수의 구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경허라는 걸출한 선승(禪僧), 아니 경허라는 꿈속의 초인(超人), 경허라는 이 땅의 부처(佛陀)를 배출하기 이전의 청계사는 숨 쉬지 못하고 쓰러져가던 이 나라 정신의 고갱이였던 것이다. 비옥한 땅은 결코 주인을 속이지 않는다. 청계사는 경허로 하여 아름답다. 이 나라 또한 그로 하여 잘못된 유교의 굴레를 벗어나 비로소 참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이 땅의 오직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경허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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