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봉규
2022-05-17 (화) 07:15문둥이 여인
안성 천장사(天藏寺)의 겨울 저녁. 문둥이 거지 여인이 밥을 얻으러 왔다. 미친바람은 제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지사방으로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만 빠꼼한 여인. 온몸 전체는 피고름 범벅이었다. 여인은 부엌에 가서 동냥통을 내밀었다. 악취가 사람들의 코를 찔렀다. 당연히 부엌문이 닫혔다.
“어서 꺼져!”
그러나 거지 여인은 부엌문을 잡은 채 울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 거지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삶의 마지막 끈이었다. 생살을 그대로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 게다가 먹을 것마저 없다면 ……. 여인은 끝끝내 한번 잡은 부엌문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엌문을 흔들었다.
“안 가면 죽여!”
“으으!”
그 소란에 경허는 무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처절한 몸부림.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의 외마디 신음 소리를 듣고 경허는 조용히 손짓을 했다. 그 거지 여인은 처음에는 경허가 부르는 손짓을 감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부엌문을 붙잡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손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미친 사람일 뿐이었다. 세상 천지에 자신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몸짓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허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친 여인은 황급히 달려갔다. 달랐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사람들 눈짓이 아니었다. 손짓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가슴에 감춰둔 불덩어리를 읽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이라면 틀림없다. 한 덩어리의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경허는 피고름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뜨거운 눈물이 고름으로 얽은 여인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렇지만 경허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묵묵부답 ……. 그리고 같은 밥상에서, 같은 이부자리에서 살을 맞댔다.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여인에게는 꿈같은 세월이 흘렀다. 몇몇 대중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경허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거지 여인과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차츰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의 손발에 생긴 작은 염증들이 점점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태허(太虛) 선사와 몇몇 스님들이 경허를 설득했다. 여인을 떼어버리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별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님, 저세상에 가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거지 여인이 떠나면서 경허에게 한 짧은 말이었다. 거지 여인은 이제 거지가 아니었다. 내일 당장 눈 내리는 산허리쯤 어디에서 얼어 죽는다 해도, 아니면 비 내리는 저잣거리 어디쯤에서 굶주림으로 목숨을 마친다 해도 그녀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었다. 육신이 무너진 어떠한 순간에도 비로소 자신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임을, 한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거짓이든 거짓이 아니든 문둥이 여인을 품에 안은 이 이야기. 어쩌면 너무나 유명한 이 이야기 하나로 경허는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슬픔. 그가 가지고 있던 그 무서운 구도(求道)가 사실은 ‘어떻게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후 그에게는 고통이 왔다. 그 여인이 남기고 간 피부병은 눈을 감는 날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닭똥으로 소주를 다려 개고기와 곁들여 드십시오.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의 주량(酒量)과 육량(肉量)은 무서울 정도로 늘어갔다. 전국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선풍을 진작시킨 그가 갑자기 유랑행각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쉰여섯 살 때였다. 월정사와 석왕사의 법문을 끝으로 그는 절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1886년 그는 문득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 개명하였고, 함경도의 두메 삼수(三水), 갑산(甲山), 장진(長津)을 떠돌며 때로는 마을 아이들의 훈장으로, 때로는 유랑걸인으로, 때로는 많은 선비들과 시정을 나누는 유한시인으로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예순네 살, 법랍 쉰여섯 살에 홀연 열반에 들었다. 1912년 4월 25일 새벽 갑산에서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