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2-04-26 (화) 10:52이학종칼럼9
언어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합의와 관례가 내포되어 있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며, 이 합의는 집단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언어는 정체된 현상이 아니다. 언어는 항상 변화의 흐름 위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구성하는 용어 역시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조건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새롭게 생겨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불교 용어, 즉 불교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도 끊임없이 변화하거나 변화를 요구받는다. 과거에 비해 사회가 복잡해졌고, 모두 분야가 다양화했기 때문에 새로운 용어와 언어가 만들어지거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최근 불교계에서 용어(단어) 문제가 불거졌다. 조계종 종단에서 한 종무원 노조원을 해고한 근거로 종정의 신성(神聖) 침해를 내세우면서, ‘과연 신성이라는 말이 불교계에서 사용할 적합한 것이냐?’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신성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 또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종교적 현상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본 관념’ 등이다. 철학적 의미에서의 신성은 ‘세상의 비속한 존재와는 구별되며, 이것과의 교통(交通)을 위하여서는 특수한 절차가 필요하고, 만일 침범당하면 초자연적인 제재를 받는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신성이 갖는 의미가 어떤 경우든 불교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불교계에서 사용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용어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정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해고의 근거는 매우 불교적이지 않다. 설사 종헌에 종정의 지위가 ‘신성을 상징한다.’고 되어 있다 하더라도, 적합하지가 않은 것이다. 종헌 자구 수정을 서두를지언정 적어도 해고라는 무자비행의 근거로 삼을 일은 아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불교계에서 10여 년 전부터 점차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 ‘명상(冥想)’ 역시 면밀한 점검이 필요한 용어이다. 명상은 부지불식간 한국불교의 대표 수행법인 선(禪), 또는 선수행(禪修行)을 대체하는 용어가 돼가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미디어에서 명상이라는 용어는 이미 대세이다.
BTN의 라디오 명상 채널에서는 명상을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아무런 왜곡 없는 순수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법’이라고 정의한다. 이 채널에서는 명상이 스트레스 감소, 기억력 및 집중력 개선, 건강한 자아 형성, 면역력 개선, 숙면에 도움을 준다는 설명을 붙임으로써 이 용어가 수행에서 건강까지를 포괄하고 있음을 밝힌다. BTN에서는 ‘지운스님의 사진 선명상’, ‘혜안스님의 불교명상’, ‘용타스님의 힐링명상’ 등 ‘명상’이라는 용어가 제목에 들어 있는 다수의 프로그램을 방송 중이다.
불교방송(BBS)도 다르지 않다. 불교방송이 방영하는 ‘명상 수행의 바다’에는 혜거, 용타, 인경, 지운 스님 등 널리 알려진 스님들이 출연해 강의했거나 하고 있는 중이다, 불교방송은 방송정보를 통해 “명상은 현대인의 정신과 육체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주는 보장(寶藏)이자, 오늘날 사회의 제반 모순을 척결해 줄 수 있는 비법”이라고 소개한다. 이 정보에 따르면, 명상은 지극히 고귀하다는 의미의 ‘보장’이며, 비밀스러운 수단[비법]이다. 불교방송은 ‘명상은 과학이다’, ‘각산스님의 새벽명상’, ‘지운스님의 명상 깨달음을 논하다’ 등의 프로그램을 방송 중이다.
명상이라는 용어는 이미 불교 교단 차원에서도 공인되어 사용 중이다. 조계종은 최근 종립 선원 봉암사가 자리하고 있는 문경에 ‘세계명상마을’을 개원했다. 이곳에서는 벌써 네 번째의 간화선 대법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다. ‘명상’마을에서 ‘간화선’ 대법회가 열리고 있으니, ‘명상=간화선’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는 조짐으로 보인다. 월정사도 최근 자연명상마을을 개원해 활용하고 있다. 선이라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용어가 명상의 활용 증가에 따라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부인하고 싶지만, 명상이라는 용어는 이미 선(禪)과 수행(修行)이라는 용어를 상당 부분 대체해가는 과정에 있다. 한국불교의 핵심 중의 핵심어인 선과 수행이 머지않아 명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조짐은 아닐는지.
불교계 밖에서 사용하던 용어가 불교계 안으로 들어와 정착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정반대의 경우로 불교의 용어가 외부로 나아가 정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이웃종교인 기독교에서 불교 용어를 차용해 사용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장로, 설교, 예배 등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웃종교에서 이 용어들을 빈번하게 활용하자 불교계에서는 이 용어의 사용을 되레 기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장로(長老, 테라)라는 매우 오래된, 그리고 아주 훌륭한 불교용어가 불교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설교와 예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 재세 시부터 사용해온 불교용어인 만큼 자연스럽게 사용하면 될 텐데 말이다. 해괴하게도 불교계는 장로를 대신해 ‘원로(元老)’라는 일반사회에서 쓰는 용어를 굳이 가져다 사용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속내를 모르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있지만, 꽤 오래전부터 한국 가톨릭에서 ‘자비(慈悲)’라는 불교용어를 아주 빈번하게, 그것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든 적이 있었다. 장로나 예배, 설교의 경우처럼 혹시 이러다가 불교계에서 자비라는 용어를 기피하거나, 나아가 ‘사랑’ 등으로 대체해 사용하지 않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역대 불자들의 합의된 마음이 담긴 불교용어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용어를 만들거나 들여올 때도 보다 치열한 토론과 전문가들의 연구를 거치는 등 보다 치밀하고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주요 종단 종무행정기관과 불교학계에 주어진 시급한 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