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넜다면 뗏목을 버려라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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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마중물 생각

 중국 광저우에서 사업을 하는 다현(茶賢) 정종일 사장이 찾아왔다. 보이차 마니아이자, 내 책 애독자다. 내가 찻물을 끓이고 급수(給水)를 하는 차도구가 고장 났다고 몇 달 전에 휴대폰 문자로 알렸는데, 귀국하면서 새 도구를 사들고 온 것이다. 

 내 책 <정찬주의 茶人기행>과 <법정스님의 뒷모습>을 읽고 나서 산방 이불재로 찾아와 그만의 방식으로 마음을 표시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인연은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신라 왕자 김지장스님 일대기 소설 <천년 후 돌아가리>를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번역료 전액을 어느 중국 대학의 조선족 출신 교수에게 정 사장이 지불했던 일이다. <천년 후 돌아가리>는 ‘인민일보’ 인터넷 신문인 ‘인민망’에 연재될 예정이다. ‘인민일보’ 베이징 본사 차원에서 결론이 났고, ‘인민망’ 하루 접속자가 5억에서 7억 명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차도구를 들고 온 정 사장과 이불재에서 차담을 하고, 점심 식사 자리로 옮겨가 4시간 동안 유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번에도 정 사장은 그만의 방식으로 마음을 표시했다. 정 사장은 자신의 궁핍했던 어린 시절 얘기를 많이 했다. 아버지의 도박으로 살림이 일찍부터 어려워져 고2 때 순천의 부잣집 집사로 들어가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겨우겨우 이어갔다는 사연, 새벽 4시부터 집안일을 해도 인색하기만 한 주인을 보면서 “나는 어른이 되어서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는 자기와의 약속, 순한 아버지와 달리 강하기만 한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 등등을 얘기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 그런데 그 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던지, 아니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던지 두 유형이 있을 텐데 정 사장은 후자 쪽이었다. 그의 꿈은 70세까지만 사업을 하고 10년 동안은 중국 천하를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산전수전 끝에 성업한 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나는 그를 보고 부처님의 ‘바다를 건넜다면 뗏목을 버려라’는 가르침이 떠올랐다. 수행자가 아닌 생활인에게도 절실한 부처님 가르침이구나! 하고 깨달음이 왔다. 나는 정 사장에게 운당(雲塘) 선생님의 천도수근(天道酬勤)이란 글씨를 선물했다. 하늘은 근면한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면서 요행수를 바라지 않는 그가 좋아할 만한 구절이 아닌가 싶었다.   

부처님 말씀과 침묵

수행자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들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건너 저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그러나 배가 없으니 어떻게 갈까? 

갈대나 나무로 뗏목을 엮어 건너가야겠군.’ 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뗏목이 아니었다면 바다를 건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뗏목에 대해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수행자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야 자기 일을 다 하는가. 

그는 바다를 건너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뗏목의 도움으로 나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워 놓고 이제 나는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서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敎法을 배워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지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했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 『맛지마 니까야 알라갓두빠마숫따』     

 갈무리 생각

 사업가가 성업을 이룬 뒤 자신의 사업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회에 환원하거나 후계자나 자식에게 넘겨준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는 사업에 매달려 평생 동안 자신을 떠나 있다가 비로소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일 터이다. 본능적으로 집착하는 인간에게 수행자 같은 고원한 정신이나 자기만의 철학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법관이나 학자, 공무원, 회사원도 자의든 타의든 은퇴한 이후가 그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불재 연못가에는 산에서 씨앗이 날아와 한자리 차지한 나무들이 네댓 그루 있다. 매화나무와 해당화 사이에 있는 쪽동백나무도 그렇다. 그런데 이 나무만큼은 처음에는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성명 미상의 나무이다. 여름이 되면 꽃이 흰 초롱꽃과 흡사하게 피는데 알 길이 없었다. 어떤 농부가 잎만 보고 벌나무 같다고 했지만 검색해 보니 꽃빛깔과 나무 표피가 달랐다. 결국 어떤 분의 도움으로 나무의 이름이 '쪽동백나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쪽'이라는 접두사가 참 귀여웠다. 쪽배, 쪽문 등 '작다'라는 뜻의 접두사였다. 그런데 동백나무와는 전혀 다르고 때죽나무와 흡사한 것이 특징이었다. 동백나무에서 머릿기름을 얻지 못한 서민들이 이 나무 씨앗을 짜서 머릿기름으로 사용한 연유로 쪽동백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겨울이 되어 꽃도 지고 잎을 다 떨어뜨린 연못가의 쪽동백나무 나목(裸木)을 보니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문득 쪽동백나무 나목이 아름답고 지혜롭게 보인다. 봄으로 건너가기 위해 꽃도 잎도 버리고, 나뭇가지 속의 수액도 뿌리로 내려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쪽동백나무는 동해(凍害)를 입어 죽고 말지도 모른다. ‘버린다’는 산스크리트어로 ‘dhu·ta’이다. 이를 음역해서 두타(頭陀)라고 한다. 그래서 두타행이란 원래 철저하게 잘 버리는 무소유수행이 아닌가 싶다. 가진 것에 집착하면 죽고, 미련 없이 버리면 산다는 가르침을 연못가 쪽동백나무에게서 얻는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는 나의 선지식 아닌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