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찬주
2021-12-29 (수) 08:39혜암스님의 원적
찬바람이 멎자 가야산 산자락과 골짜기는 잠시 포근해졌다. 겨울 햇살이 숲과 나무를 어루만져 주었다. 혜암은 미소굴에서 나와 가끔 중봉암 터를 응시하며 원당암 경내를 포행했다. 대중들이 고개를 숙이고 합장할 때마다 혜암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암은 보광전에 들어 관세음보살님에게 삼배를 했다. 원당(願堂)에서는 영단을 향해 합장하며 ‘영가들이여, 생사해탈하시오.’라고 빌었다. 이윽고 달마선원에 올라 문을 열자, 좌복에 앉아 있던 보살과 거사들이 놀라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혜암은 좌복을 이탈하지 말고 참선하라며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러자 보살과 거사들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혜암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모습이 있다면 바로 ‘이뭣고’를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학벌이 뛰어나고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혜암은 그런 재가신도를 신(信)하지 않았다. 간절하게 ‘이뭣고’ 하는 사람을 믿었다. 스님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상좌들 중에서도 선방에 다니는 수좌상좌를 으뜸으로 쳤다. 혜암은 달마선원 2층으로 올라가 전깃불을 켠 뒤 좌복에 앉았다. 문득 언젠가 대중들에게 한 말이 떠올라서였다.
‘아직 극락으로 가는 배를 마련도 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리 즐겁게 깊이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잠을 자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죄를 받으러 온 사람이 일도 해놓지 않고 어찌 잠을 잡니까. 한밤중이 되어도 냄새나는 송장은 안고 눕지 말라고 했습니다. 독한 화살이 들어와 몸에 중병이 들었는데 잠을 잘 수 있는지, 밤에 잠이 오면 헤아려보십시오. 늙고 병들고 죽는 병에 들었는데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잠을 이겨내야 합니다.’
대중에게 한 법문이기도 하지만 한밤중에도 결코 눕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면서 대중을 경책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나 다름없었다.
하늘은 쪽빛이었다. 가을 하늘보다 더 푸르렀다. 미세한 번뇌마저 사라진 마음자리 같았다. 혜암은 허공과 하나 된 자리로 들어갔다. 허공이 되어 몸도 마음도 사라진 그런 자리였다. 마음이 푸른 하늘을 모두 덮은 듯했다. 혜암은 뒤늦게 달려온 시자에게 말했다.
“염화실에 가서 붓과 벼루를 가져오너라.”
미소굴로 돌아온 혜암은 시자더러 먹을 갈게 했다. 먹이 짙어지자 묵향이 미소굴 안에 가득 번졌다. 혜암은 가는 붓을 들어 흰 종이에 써내려갔다. 임종게(臨終偈)였다. 자신의 입적을 예감하고 읊조리는 게송이었다.
我身本非有 心亦無所住
鐵牛含月走 石獅大哮吼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시자는 임종게인 줄 모르고 벼루를 치우고 붓을 물에 빨았다. 혜암의 태도가 너무나 천연덕스러웠으므로 시자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혜암의 일과는 늘 한결같았다. 포행은 시자의 부축을 받아 경내에서만 하고, 하루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이뭣고’를 했다. 시자가 저녁공양을 하고 들어오자, 문도들에게 늘 당부하던 말을 또 시자에게 했다.
“인과(因果)가 역연하니 참선 잘해라.”
원주 소임을 보고 있는 각안의 조언을 받아 현철, 현오, 도행, 행자 문광이 혜암을 시봉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구도 혜암의 임종을 알아채지 못했다. 시자들은 한밤중이 되면 곤하게 잠에 떨어졌다. 그러나 혜암은 그 시간에도 의자에 앉아 ‘이뭣고’를 했다.
혜암은 달이 떠오르자, 미소굴을 나와 마당을 천천히 돌았다. 젊은 시절 오대산에서 행선(行禪)을 하며 용맹정진하던 때가 그립기도 했다. 밤이 되면 잠을 쫓기 위해 서대와 적멸보궁 사이의 산길을 밤새 오가며 6달을 보냈던 것이다.
달빛은 원당암 경내를 구석구석 밝히고 있었다. 보광전 마당의 모래는 달빛이 내려앉아 금싸라기처럼 반짝였다. 불이 꺼진 방들만 깊고 푸른 밤 속으로 잠겨들었다. 혜암은 다시 미소굴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은 뒤에도 ‘이뭣고’를 살폈다. 비록 기력이 다해 의자를 이용하여 장좌불와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화두를 들고 있지 않으면 송장이나 다름없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혜암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 두타제일인 마하가섭을 만세의 정진불(精進佛)이라고 늘 존경해 마지않았다. 부처님이 “가섭이여, 그대도 이제는 늙었다.”고 두타행을 만류하자, “저는 두타행을 기쁘게 합니다. 그리고 제가 두타행을 하여 뒷날의 수행자들에게 본보기가 된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입니다.”라고 말하여 부처님에게 “착하다, 가섭이여. 그대 생각대로 정진하라.”고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마하가섭이 정진한 여러 가지 두타행 중에서 혜암은 항상 앉아 있을 뿐 눕지 않는 장좌불와,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 오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오후불식, 주림만 면하게 배를 적시는 소식(小食) 등을 평생 지켰다. 또한 혜암은 마하가섭이 삼림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산중암자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혜암은 의자에 앉은 채 정진해 왔던 산중암자들의 이름을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고행 정진했던 산중암자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흘러갔다.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오세암, 운달산 금대, 벽발산 천제굴, 오대산 오대, 태백산 동암, 오대산 사고암, 영축산 극락암, 가야산 중봉암, 지리산 상무주암 문수암 칠불암 도솔암, 희양산 백련암.... 혜암은 원당암에 이르러 미소를 지었다.
몰록 하룻밤을 유유자적한 것이 분명했다. 도량석의 목탁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미소굴의 창이 새벽빛으로 변했다. 새들이 다른 날보다 일찍 청아한 소리로 노래했다. 경내를 밟는 대중들의 부지런한 발자국 소리도 어김없이 들렸다.
혜암은 시자의 아침 문안인사를 받은 뒤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미소였다. 금생에 인연 맺은 모든 중생들과 작별하는 그윽한 미소였다. 시자가 미소굴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혜암의 영가가 그 천진한 미소와도 작별한 뒤였다.
세상 나이 82세, 법랍 56세. 2001년 12월 31일(음 11월 17일) 10시. 해인사 법당과 산내 암자마다 사시마지를 올리는 시각이었다. 조계종 종정 혜암의 원적(圓寂)을 알리는 대종 소리가 가야산 산자락과 골짜기를 타고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방장과 주지, 그리고 해인사 스님들과 신도들이 원당암 미소굴 쪽을 항하여 합장했다. 성철 이래 또 하나의 큰 별이 떨어졌음을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해인사를 찾은 참배객들만 영문을 모르 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경내를 서성거릴 뿐이었다. 법구는 곧 해인사 청화당으로 옮겨졌다. 이승의 헌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으로 갈아입은 혜암은 ‘曹溪宗正 慧菴堂 性觀大宗師之覺靈(조계종정 혜암당 성관대종사지 각령)’이라 하여 위패에 봉안되었다.
상좌들이 가깝고 먼 곳에서 누구보다 먼저 청화당으로 왔다. 문도대표 성법과 수좌상좌 원각이 자리를 지켰으며 각안이 사형사제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뒤이어 무영 무상 무일 여연 현조 도봉 대우 대운 정견 도각 지공 묵조 적묵 대오 능도 능혜 종오 법인 일화 도안 지도 정인 진각 성각 정안 중도 명철 돈오 원오 성오 석교 경락 경조 법수 진고 무진 보안 보명 법철 만각 은산 지각 지원 은광 각경 정경 원경 등이 달려왔다.
그날, 장례는 종단장(宗團葬)으로 치르기로 정했고 장의위원회 명단도 의견을 모아 지체 없이 천명했다. 증명은 서옹 서암 월하, 호상(護喪)은 해인총림 방장 법전, 장의위원장은 총무원장 정대, 집행위원장은 해인사 주지 세민이 맡았다.
궁현당으로 분향소가 마련되고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전국에서 문상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해인사에서 안거를 났던 젊은 스님들은 분향을 하고 나서는 저마다 혜암의 상당법어를 떠올리며 추모했다.
‘중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몸의 안일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만 내일도 그만 금년도 이대로 명년도 그대로 허송세월하다가 허망하게 죽을 때에 후회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不行芳草路하면 難至花落村이로다.
꽃다운 풀밭 길을 걷지 않으면 꽃 지는 마을에 이르기 어려우리.’
‘어떤 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까.
돈(頓)이란 단박에 망념을 없앰이요, 오(悟)란 얻은 바 없음을 깨치는 것입니다.
入此門內莫存知解하라. 但莫憎愛洞然明白하리라.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분명히 깨치리라.
數片白雲籠古寺하고 深谷綠水繞靑山이로다.
몇 조각 흰 구름은 옛 절에 떠 있는데 깊은 골짜기 푸른 물은 청산을 둘러 흐르네.’
‘출세대장부들여, 구경각의 해탈을 위하여 활안(活眼)으로 성찰하라.
學道如鑽火하야 逢煙切莫休로다.
直待金星現하야 歸家始到頭로다.
대도를 배우려면 불을 비벼대듯 연기가 나도록 쉬지를 말라.
불꽃이 나타나는 때가 돼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리.’
혜암 문도들은 장례 기간을 7일로 정했다. 그리고 영결식과 다비식을 2002년 1월 6일로 잡았다. 조문 기간 내내 문상객들의 차량은 산문 안팎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가야산을 지나가는 바람과 홍류동을 흐르는 계곡물이 구슬픈 소리를 냈다. 분향소에서는 대중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고, 보광당에서는 송월과 구참스님들이 깃발 모양을 한 오색의 번(幡)과 만장(輓章)에 글을 쓰느라고 밤을 새웠다. 나무대성인로왕보살(南無大聖引露王菩薩)이라고 쓴 번은 맨 앞에 설 것이고, 그 뒤를 화려한 만장들이 따를 터였다. 만장의 글들 중에서 혜암의 진면목을 담박하게 드러낸 조시가 눈에 띄었다. 구산의 법제자 근일이 문상을 하고 부석사로 돌아가면서 놓고 간 조시였다.
장좌불와 오십 년 하시니
보살행과 수행함이 중생들의 스승이네
혜암스님이시여, 무심히 조계봉에 오르셨으니
성관고불이시여, 본래자리로 돌아오소서.
長坐不臥五十年 菩薩修行爲衆先
慧菴無心曹溪峰 性觀古佛本來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