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 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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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암은 자신과 ‘이 뭣고’ 화두가 하나 되는 타성일편의 경지에서 설악산 오세암과 태백산 동암에서 3년을 보냈다. 자신의 감정과 의지와 상관없이 ‘이 뭣고’가 순일하게 성성한 경지였다. 이러한 체험은 견성성불을 이루는 데 참선공부가 지름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래서 훗날 혜암은 누구를 만나든 ‘참선은 본래면목으로 돌아가는 인간 혁명의 길’이라고 자신 있게 설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 방장이 되어 원당암 달마선원에 모인 재가불자들에게 설한 다음과 같은 법문도 같은 맥락이었다.

 <참선이라는 것은 본래면목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혁명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최상의 혁명입니다.

 본래의 길에서 탈선돼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에게 안 죽는 길, 살 길로 찾아가는 길이 바로 불법이고 참선입니다. 하나가 틀리니 모두가 틀려지는 것입니다. 뒤바꾸어 보고 들어 아는 것을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나를 보고, 바로 듣고, 바로 깨닫고, 바로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보물인 것 같아도 이것 때문에 우리가 고생을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깨달은 뒤에는 이것이 보물로 변합니다. 보물은 여러분한테 다 있는데, 이것 때문에 큰 보물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본래 마음은 밝기로 말하자면 일월보다도 밝고, 덕으로 말하자면 천지보다도 더 덕이 많고, 천지의 조화보다도 더 조화가 많습니다. 이렇게 엄청나고 귀중한 보물을 찾는 공부를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무엇 때문에 하는 줄 모르니까 참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보면 현상 그대로가 실상이면서 진리인 것입니다. 깨쳐 놓고 보면 똥 덩어리도 부처이고, 개도 부처이고, 닭도 부처이고, 돌멩이도 부처이고, 모두가 나입니다.

 참선은 아는 데서 출발하여 모르는 데 이르는 것이며, 알고 모르는 것이 없는 자리이니 도(道) 자리에 가서 알고 모르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중생들은 낮에는 밝은 것을 의지하고, 저녁에는 어두운 것을 의지해서 살지만 우리 마음은 상대가 끊어졌기 때문에 짝이 없습니다. 내 본심은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고, 착한 것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복도 아니고 죄도 아니고, 아무것도 붙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느 날은 참선공부를 하면서 확신을 갖지 못한 재가불자들을 위해 이런 법문을 들려주기도 했는데, 시키는 대로 하는 바보처럼 소금을 지고 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라고 설법했다.

 <공부를 지어 가는데 알래야 알 수 없는 대목, 재미도 없는 대목으로 한결 바늘 끝처럼 날카롭게 분별심 없이 ‘이 뭣고’만 물 흘러가는 것 같이 파고들어 갑시다. 쉴 새 없이 들어가면 도(道)는 나오지 말래도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서울 가는 길을 가는데 어찌 서울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공부는 미묘법이고 비밀법입니다. 세상 공부공식하고 달라서 격외선이라고 합니다. 도 닦는 공부는 특수법으로 상대가 있는 세상 과학이나 철학과는 다릅니다. 상대가, 대(對)가 없는 데로 들어가니까 분별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근기가 약한 사람인 데다 아는 것이 좀 있으니까 파리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는 공부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 공부는 양심을 속이지 않고 참다워야 합니다. 어중간한 사람이 제일 공부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알려면 그냥 확실히 알던지, 모르려면 아무것도 몰라 시키는 대로 소금을 지고 물에 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도를 빨리 깨닫습니다.

 그런데 중간치기는 백여우같이 이리 한 번 따져보고 저리 한 번 따져보기만 하다가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들어가기가 쉬운 법입니다. 꾀를 내지 마십시오. 따지지 마십시오. 그래야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래도 백여우 노릇하겠습니까. 그냥 재미없고 알 수 없는 자리만 머무십시오. 무슨 수가 생길 것입니다.

 나는 여자니까, 병들었으니까, 노인이니까, 법문을 모르니까 공부가 안 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모든 이유들은 마구니들이 공부하지 못하게 꾸며대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화두가 안 뭉쳐지고 힘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전부 마구니의 조화인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공부는 오늘 배운 만큼 한 권 알아지고 내일은 두 권, 한 달 후는 열 권 알아지고 쌓이는데, 이 도 닦는 공부는 버리는 공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스님네들이 계율을 배우는 것은 행동을 배우는 것이고, 글을 버리고 말을 떠나는 것은 참선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나무장사로써 글자 한 자 몰라도 도를 깨친 까닭에 그 법문은 부처님과 다름없고, 천하의 학문이 많은 사람도 절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천태스님이 도를 닦다가 크게 깨치니 스승 남악스님이 ‘대장경을 다 외우는 아무리 큰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너의 한없는 법문은 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알아도 안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깨치기 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부처님 마음과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고봉스님의 한 제자가 출가해서 경을 배우는데 3일 동안에도 한자도 기억하지 못하여 대단히 슬퍼했는데, 누가 이를 보고 전생에 참선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하여 참선을 시켜보니 과연 남보다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크게 깨치어 고봉스님의 당당한 제자가 됐다고 합니다.

 세지총명(世知聰明)이란 말같이 똑똑하고 재주가 있고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똑똑한 척하지 마십시오. 재주를 부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지옥으로 갈 일을 만들 수가 있으니 재주를 부리지 마십시오. 

 세상일을 잘하려고 하는 것은 진흙으로 옥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이 옥이 되겠습니까. 불쌍한 사람들의 짓입니다.

 ‘이 뭣고’하는 자리가 부처님 마음하고 딱 합쳐진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있고, 약사유리광 부처님도 있고, 문수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도 다 계십니다. 우리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뭣고’하는 자리에 다 모여 있습니다.

 화두 당처가 불성(佛性) 자리입니다. 부처님 마음자리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계신 곳은 먼 곳이 아닙니다.>

 혜암의 설법은 힘이 있었다. 자신의 실참에서 비롯된 지혜의 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36세 때 늦은 봄에 들어간 태백산 동암에서의 정진은 수좌로서 분기점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 태백산에는 여러 수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입산하여 정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955년에 태백산 동암에는 혜암이, 태백산 도솔암에는 일타가 수행했다. 그리고 법전은 문경 묘적암에서 일여의 경지를 체득한 뒤, 파계사 성전암의 성철에게 인가받고 나서는 바로 1958년에 태백산 홍제암으로 들어왔다.   

 어느 여름 날, 세 사람은 정진 중에 한자리에 모여 산중 절터의 당간지주 아래서 나이순으로 혜암이 가운데 서고 일타가 오른쪽, 법전이 왼쪽에 자리 잡고 한담을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밀짚모자와 장삼은 같은 모양이었지만 그때 신은 각자의 신발에도 그들의 가풍이 그대로 드러났다. 기념사진 속의 일타는 귀한 운동화를 구해서 멋들어지게 신고 있었고, 법전은 겨울에 신던 털고무신을 여름에도 한결같이 신고 있었고, 혜암은 깔끔한 성격대로 흰고무신을 단정하게 신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한 암자에 모여 살지는 않았지만 각자가 분심을 내며 탁마하고 정진했다. 그 결과 일타는 도솔암에서 6년 동굴불출의 정진 끝에 깨달음의 노래를 했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하구나.

 頓忘一夜過 時空何所處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성철에게 인가받고 뒤늦게 홍제암으로 들어온 법전은 입산시(入山詩)를 읊조렸다.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도인은

 망상도 구하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혜암은 태백산에서 다시 오대산 사고암으로 가서야 확철하게 대오했다. 깨달음이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혜암은 동암에서 정진할 때보다도 고행을 더 계속했던 것이다. 훗날 혜암은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사고암은 임시로 네 치각기둥으로 홑집을 지어놓으니 추위에 못 견뎌 누구든 살지 못했습니다. 산승은 좋은 계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양식도 불 땔 나무도 없이 냉방에 나무토막 하나 갖다 놓았습니다. 그 방에서 한 끼에 잣잎과 콩 열 개, 물만 마시고 밤낮으로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월정사에서 쌀을 보내 와서 필요 없으니 가지고 가라 해도 안 가져가기에 새나 쥐들이 먹으라고 마루에 두었습니다. 5개월 동안 금식하고 정진했더니 신심일여가 되었습니다.”

 구렁이나 멧돼지를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산중에 사는 대중으로 여기어 서로 즐겁게 살자고 발원할 뿐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멧돼지는 사고암의 감자밭을 해치지 않았다. 감자밭 주위만 뒤지기만 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랐다. 

 그 무렵 혜암의 건강은 정상이 아니었다. 몇 해 전 가슴에 가격을 당한 상처가 심해져 사경을 헤매던 중이었다. 상원사에서 살 때 체격이 우람한 한 수좌가 혜암을 오해하여 중상을 입힌 것이 원인이었는데, 혜암은 그 고통을 전생의 업보로 여길 뿐 미혹한 마음을 쳐부수었다. 혜암은 그 수좌를 원망하지 않고 차라리 자신이 돌을 등에 매고 동해바다로 들어가 고기들에게 보시하려는 자비심을 내기까지 했다. 그래서 걸망을 매고 동해 바닷가를 거닐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암은 그런 미혹한 상황을 전생의 허물이라고 여기는 인과법으로 잘 극복하여 마침내 사고암에서 대오를 이루게 되었다.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부수니

 해가 돋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

  생멸의 미혹도 깨달으니 청정법신이 되고, 그것마저도 투과하니 밝은 해가 천지를 비추고 있다는 오도송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