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의 선지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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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결의한 봉암사 대중들은 왜색불교를 벗겨내는 일부터 실천했다. 왜색불교 중 가장 눈에 드러난 것은 가사의 색깔이었다. 일본식의 검정색 가사나 부처님도 입지 않은 붉은 비단가사를 걸친 승려들이 많았던 것이다.

 봉암사 대중들은 율장에 의거하여 면가사로 하되 3종의 색이 섞인 괴색으로 염색하여 마련했다. 그 모양은 보조국사의 가사장삼을 참고하였다. 그때의 일을 묘엄스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이 총림을 하려면 가사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누런 광목 40통을 샀지요. 그걸 양잿물에 적셔서 뙤약볕에 말려서 바래가지고 제일 처음 노랑물, 그 다음에는 빨강물, 그 다음에는 파랑물을 들였어요. 그런 뒤에도 괴색을 내려고 가마솥에다 식초와 소금을 넣고 몇 번을 삶았다가 꺼내 주무르곤 했지요. 그런데 그때 성철스님께서 비구니는 비구 옷에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율장을 펴놓고 부처님께서 ‘비구니는 육친 관계가 아니거든 비구를 시봉해 주지 마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대중들이 사용하던 바루도 바꾸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철바루나 와바루(흙바루)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여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목바루를 모두 모아 깨뜨려서 태워버렸다. 또한 예전에는 외출할 때만 가사장삼을 입었는데, 봉암사에서는 절 안에서도 가사장삼을 입도록 하였다. 다만 울력할 때는 가사장삼 대신 당나라 측천무후가 선종 스님들에게만 허락한 오조 괘락을 입게 하였다.

 두루마기를 승복 대신 입고 다니던 당시 스님들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출은 가능한 한 두 사람이 함께 다니게 했고, 반드시 육환장을 짚고 삿갓을 쓰게 했다. 그리고 신도가 절로 스님을 찾아오면 반드시 삼배를 올리게 했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의 분위기는 일제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남아 스님들을 얕보곤 했는데, 봉암사 대중들은 부처님 법답게 바꿔야만 승려의 위의와 자존을 되찾는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절 안에 있던 산신각과 칠성각도 부수어 철거했다. 부처님 법에 없는 전각들이기 때문이었다. 훗날 혜암스님도 봉암사 결사 당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 바루와 옷을 바꾸고, 능엄주를 하고, 절에서 산신각과 칠성각을 없애고, 보살계를 신설해서 신도들이 스님에게 삼배하도록 시키니까 봉암사 산중에는 외도들이 산다고 험담하는 신도들이 많았어요. 어떤 스님은 있지도 않은 법을 자기 식대로 만들어서 귀찮게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삼배라는 것이 그때부터 성행했어요. 알고 보면 큰스님들께서 하신 말씀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정법인데, 그걸 모르고 비난했으니 그냥 웃을 수밖에요.”

 실제로 우봉은 봉암사를 떠나버렸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에 동조하여 새로 방부를 들이는 스님도 있었다. 성철의 평생 도반이었던 향곡도 뒤늦게 방부를 들인 스님이었다. 그때 향곡은 속인 행색을 하고 있었다. 묘엄스님의 증언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월내 큰스님이 오신다고 해서 점촌역에 나가보니까 복장이 좀 이상했어요. 마치 중절모자 쓰신 영감님 같더라고요. 옷도 속인 같이 입어서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점촌역 신도 집으로 가셔서 장삼을 보시 받았어요. 그런데 그 장삼도 어떤 보살이 만들었는지 주름치마처럼 주름을 12개를 잡아가지고 애들 원피스처럼 입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나와 묘희는 막 깔깔깔 웃고 그랬어요.” 

 향곡도 봉암사로 와서야 여법한 가사장삼을 입었다. 물론 행색만 바꾼 것이 아니라 구도를 향한 의지도 달라졌다. 성철이 향곡의 구도의지에 불을 붙였다.

 “죽을 사람을 다 죽이면 비로소 산 사람을 보게 되고, 죽은 사람을 다 살리면 비로소 죽은 사람을 본다 하니 그 뜻이 어떠한가(殺盡死人 方見活人 活盡死人 方見死人 其意如何).”

 그러나 몸집이 우람한 향곡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에 36세의 동갑내기인 성철은 더욱 다그쳤다.

 “지금까지 니가 한 공부는 참공부가 아닌기라.”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자, 이 화두 받거라. 내가 니 줄라고 써 둔 기다. 니는 대중 규율에 얽매이지 말그라. 니한테는 선방 같은 거 필요 없다.”

 향곡은 성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스스럼없이 믿는 도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향곡은 또 다른 화두를 들고 죽기 살기로 용맹 정진했다. 대중과 함께 생활하지 않고 혼자 떨어져 매진했다. 향곡은 대중의 양해를 받아 선방에 들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앉아서 정진했다. 어떤 날은 얼음이 언 개울가에서, 또 어떤 날은 양지바른 바위에 앉아 잠을 자지 않은 채 좌선삼매에 빠졌다.

 마침내 향곡은 봉암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화두를 타파했다. 스승 운봉에게 이미 견처를 인가받고 전법게를 받았지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의지로 확철대오했다. 향곡은 긴 오도송을 읊조렸다.

 (전략)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수레같이 둥근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曦陽一笑千古喜

 鳳岩數谷萬劫閑

 來年更有如輪月

 金風吹處鶴唳新

 향곡의 오도는 봉암사 대중들에게 조사선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혜암도 자신이 직접 옆에서 본 사실이므로 정진의 힘을 얻었다. 화두를 들고 있으면 분명코 어느 땐가는 관문을 돌파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봉암사 대중들은 참선정진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양식이 늘 부족했다. 산자락에 절 소유의 논밭이 있지만 잡곡이나 조금 수확할 뿐이었다. 대중들이 가끔 탁발을 나가기도 하지만 군에서 나오는 배급 쌀을 타기 위해 가은면까지 지게를 지고 걸어 내려간 적도 있었다. 지게울력은 신참 수좌들의 몫이었다. 날마다 땔나무를 두 짐씩 해오던 혜암은 공부만 했으면 하고 은근히 아쉬워했다. 청담이나 향곡이 대중의 양해를 받은 뒤 오로지 참선만 하여 이루어낸 큰 성취를 지근거리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혜암은 참선공부만 하기 위해 성철을 찾았다.

 “스님, 봉암사를 떠나겠습니다.”

 “어디로 갈라꼬. 그라노.”

 “김룡사 금선대로 가겠습니다.”

 “그래, 금선대에서 확실하게 공부해 보그래이. 내가 선방에서 한 말에 걸림이 없을 만큼 잘해야 된데 이.”

 “출격대장부가 되라는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혜암은 성철의 허락을 받고 봉암사를 떠났다. 금선대는 김룡사에서 잰걸음으로 30여 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산 정상에 있는 암자였다. 혜암은 봉암사에서 익힌 가풍을 지키면서 기둥에 묵언(黙言)이란 패를 달았다.

 누가 금선대에 오르면 지게를 지고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오직 무자 화두에만 매달렸다. 그러다가도 문득 성철이 봉암사 선방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

 ‘예전에 한 조실스님이 조실방에 있었다. 그런데 사자 한 마리가 늘 조실방 앞에서 지키며 들어가려는 뭇사람들을 모두 물어 죽였다. 부처가 와도 물어 죽이고 마구니가 와도 물어 죽였다. 어떻게 하면 무서운 사자에게 물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물리지 않고 들어가는 그가 바로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인 것이다.’

 산자락에 노란 원추리 꽃이 군락으로 핀 봄날이었다. 혜암은 포행을 하면서 문득 사자에게 물리지 않고 조실방에 들어갈 수 있는 경계를 체험했다. 부처와 마구니를 죽이는 그 사자를 물리치고 조실방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출격대장부의 길을 보았다.

 암자로 돌아와 좌복에 앉았을 때도 그 성성한 체험은 지속됐다. 혜암은 몰록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렸다. 방 안에 들었던 햇살이 스러지고 대신 그 자리를 어둠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혜암의 마음은 불이 하나 켜진 듯 환했다. 밝아진 마음은 낮과 밤의 시간을 벗어나 있었다. 혜암은 즉시 걸망을 챙겼다.

 ‘이것이 바로 조사의 말에 걸리지 않는 경계인 것일까.’

 혜암은 바로 해인사로 달려가 인곡에게 엎드렸다.

 “스님, 조사의 말씀에 걸림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마디 묻겠다. 덕산스님을 만난 노파가 남긴 말이다.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은 얻을 수 없다(三世心不可得)는데 너는 어디에 점(點)을 찍겠느냐.”

 덕산선사는 사천성 출신으로 속성은 주(周)씨였다. 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율장과 경전을 두루 익힌 학승이었다. 특히 <금강경>에 해박하여 사람들은 그를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렀다. 덕산은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선종의 본거지인 남방으로 내려갔다. 바랑에 청룡법사가 저술한 <금강경청룡소초>을 넣고 호남성 예양(현 예현)에 다다랐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팠으므로 떡집을 찾았다.

 덕산이 떡집에서 노파에게 말했다.

 “떡 한 접시만 주시오.”

 “스님, 바랑에 든 것이 무엇이오.”

 노파가 덕산의 바랑에 든 물건을 궁금해 했다. 덕산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가 연구한 <금강경청룡소초(金剛經靑龍疏鈔)>입니다.”

 그러자 노파가 덕산에게 떡을 파는 조건을 걸었다.

 “스님, <금강경>에 대해서 한 말씀 묻겠습니다. 대답하시면 떡을 그냥 드리고, 못하시면 떡을 팔지 않겠습니다.”

 “좋소. 말해 보시오.”

 “<금강경>에는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겠습니까.”

 오늘 점심으로 떡을 공짜로 먹겠구나, 하고 흥분했던 덕산은 아무 말도 못하고 떡집을 물러서고 말았다.

 “자, 너는 노파의 말에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혜암은 덕산이 삼세의 시간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단번에 뛰어넘고자 대답했다.

 “저는 무조건 떡을 먹겠습니다.”

 “오매일여(寤寐一如)는 되느냐.”

 오매일여란 자나 깨나 화두가 성성한 경지를 말했다. 혜암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안됩니다.”

 “그렇다면 더 용맹 정진하거라.”

 혜암은 다시 봉암사로 갔다. 봉암사 선방은 여전히 치열했다. 장군죽비를 든 성철의 고함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성철은 꾸벅꾸벅 조는 수좌에게 세숫대야 물을 붓는가 하면 ‘밥값 내놓으라!’며 멱살잡이를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