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청혼 거절하고 성자의 길 택한 ‘아노빠마’ 

고따마 싯다르타가 그랬듯이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 재세 시에 모든 것을 갖춘 이들이 출가를 한 경우를 살펴보면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듣거나, 오랜 전생부터 쌓아온 공덕이 컸다는 특징이 있다.  

아노빠마(Anopamā) 역시 오랜 전생부터 많은 공덕을 쌓아온 여인이었다. 아노빠마는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하기 이전의 과거 부처님들 아래서 덕성을 닦고 이러저러한 생에서 해탈을 위해 착하고 건전한 것을 쌓았다. 그녀는 차제로 해탈을 성숙시키는 원리를 성장시켜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싸께따(Sāketa) 시의 ‘맛자(Majjha)’라는 이름을 가진 한 부호의 딸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비교할 수 없는[無比]’ 아름다움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노빠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철저하게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의 여성들은 아버지나 남편에게 절대적 복종을 강요당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물론 남성들에게 여성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부담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의무는 순차적으로 여성이 결혼하기 전에는 부친, 결혼하고서는 남편, 늙어서는 자식에게 주어졌다. 여성은 부친의 보호를 떠나서 반드시 시집을 가야 했는데, 당시 여성을 시집보내는 가장 좋은 시기는 관행적으로 사춘기 직전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 시기가 되면 딸 가진 아버지들은 사윗감을 골라 혼담을 진행하고, 혼인이 성사되면 지참금을 들려 시집을 보냈다. 예외적으로 팔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뛰어난 미모로 인해 뭇 남성들로부터 애정의 눈길을 받으며 자란 아노빠마는 성년이 되었을 때, 많은 부호의 아들들, 대신의 아들들, 왕자들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사신이나 매파를 파견하여 ‘당신의 딸 아노빠마를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이러저러한 것을 주겠소.’라며 잇따라 청혼을 해왔다. 실제로 그녀에게 값비싼 선물을 보내오는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숱한 남성들이 흥정을 해오는 광경들을 목격하고는 도리어 ‘결혼하여 영위하는 가정생활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생각했다. 결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아노빠마의 부모는 사랑하는 딸 아노빠마를 위한 일이라면 아끼지 않고 돈을 썼다. 어린 시절부터 최고급 옷을 구해 입었고, 온갖 귀한 음식을 먹였으며, 하인 수십 명을 배치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교대로 지극정성 보살피도록 배려했다. 햇볕에 그을린 적도, 추위에 떤 적도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낸 아노파마는 나아기 들수록 용모가 더욱 수려해졌다. 

그녀의 미모가 입소문을 타면서 널리 알려지면서 아노빠마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왕자와 대신과 부호의 자식들의 수도 늘어만 갔다. 어떤 왕자들과 부호들은 맛자에게 “당신의 딸 아노빠마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그것보다 여덟 배의 황금과 보화를 드리겠소.”라고 직접적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더구나 아노빠마는 눈부신 외모는 물론 착하고 겸손하며 따뜻한 심성을 가진 처녀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다. 실제 그녀는 그 누구도 업신여겨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으며, 한순간도 진중함을 잃지 않았던 성정의 소유자였다.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재력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늘 진지하고 살가운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크게보기

아노빠마는 혼자 있을 때에는 명상에 잠긴 듯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다. 특히 그녀가 고따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난 이후에는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그녀는 어느 날 아버지가 한 왕자에게 자신을 시집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에게 결코 왕자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예기치 못한 딸의 완강한 거부에 아버지 맛자는 크게 당황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노빠마야, 그동안 내가 너를 애지중지 키운 이야기를 하자면 7일 낮밤을 해도 부족할 것이다. 혹여 바스러지지는 않을까 깨뜨려지지는 않을까, 안고 어르고 달래며 보낸 세월이 저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네가 조금이라도 이 애비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만 고집을 꺾고 왕자와의 혼사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딸을 설득하는 맛자의 표정에는 노기와 회한이 교차하고 있었다. 보석보다 더 귀하게 키운 딸이 애비의 말을 듣지 않다니, 분통이 터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맛자는 대부업에서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거부’가 된 장자였다. 재산이라면 부러울 것이 없던 그에게 한 가지 쟁취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권력이었다. 딸을 왕자에게 시집보내 권력까지 손에 쥐는 것이 바로 눈앞에 왔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딸이 응당 치러야 할 혼사를 거부하고 있으니 아비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딸에게 처음으로 느끼는 배신감과 야속함에 맛자는 밤잠을 설쳤다.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이라는 아버지의 거듭된 요구에 아노빠마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본 아비의 얼굴도 따라서 굳어졌다. 딸의 굳은 표정에 짙은 슬픔이 드리워져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언제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만을 안겨주던 딸에게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생경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아예 혼인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듣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이 밀려왔다. 딸이 왕자비가 된다는 것은 곧 권력이 생긴다는 의미인데, 맛자는 이 기회를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권력은 그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노빠마, 너는 지금 이 애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구나. 네게 청혼을 해온 왕자는 머잖아 국왕이 되어 세상을 호령할 수도 있는 왕자의 신분이 아니더냐? 도대체 너는 무엇을 더 얻겠다고 이 과분한 혼사를 외면한다는 말이냐? 내 지금까지 너를 그토록 아끼고 아껴왔건만 오늘 네 말을 들으니 지난 세월이 한스러울 따름이구나!”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아노빠마가 얼굴을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노빠마가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 저는 왕자가 청혼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리어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오늘 저는 돈으로 살 수 없고 권력으로도 쟁취할 수 없는 드높은 경지를 얻기 위해 부모님 품을 떠나겠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 떠나는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아버님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노빠마는 전에 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오늘날까지 부모님의 은덕으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손끝에 먼지 하나 닿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산해진미에 입을 놀리며 진귀한 보석들로 몸을 치장하였고 하인들의 달콤한 말에 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무엇이든 부족한 게 없었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몸을 치장하는 노력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금은보화에 묻혀 사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회의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밀려드는 의문과 원인 모를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결심을 이행하고자 합니다.”

맛자는 부르르 떨었다. 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겠다는 좌절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아, 결국 내 딸을 이렇게 잃고 마는구나!’ 맛자는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분노와 회한의 눈물이었다. 아버지의 흐느끼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노빠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선 딸의 뒷모습에 맛자는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사랑하는 내 딸 아노빠마야.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말이냐? 이 애비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네가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기꺼이 너를 보내줄 것이다.”

아노빠마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저는 오늘 드높은 가르침, 담마[法]에 귀의할 것입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그곳엔 위대한 스승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전엔 고따마 싯다르타라고 불렸고 지금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분, 부처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집에서 나온 아노빠마는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밤새 맨발로 사왓티를 향해 걸었다. 귀하게 자란 덕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험하고 두려운 밤길이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붓다의 상가 앞에 선 아노빠마는 어둠을 뚫고 길을 걷는 동안 밤바람에 헝클어졌던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발등에 묻은 흙도 말끔히 털어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그녀는 상가 안으로 들어섰다. 수백 명의 수행자들이 각자의 수행처에 앉아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노빠마는 고개를 들어 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차오르는 기쁨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행자들이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노빠마는 눈을 뜨고 수행자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가 밖에서 누군가가 발우를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수행자들이 오른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으로 예를 표했다. 아노빠마도 그들을 따라 몸을 깊숙하게 숙였다. 잠시 후 땅을 향하고 있는 아노빠마의 눈에 불룩 솟은 발등이 들어왔다.

“아노빠마여, 고개를 들라.”

융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반듯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들자 막 떠오른 태양이 눈을 부시게 하는 듯 광명이 가득했다. 심장이 몸을 뚫고 나올 듯 쿵쿵쿵 요동쳤다. 잠시 뒤, 환한 빛에 멀었던 눈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실루엣처럼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상가의 큰 스승 부처님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당당한 가슴과 둥근 어깨, 붉은 입술과 감청색 눈, 너르고 평평한 이마와 높은 정수리, 태양보다 밝은 미간의 빛이 절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아노빠마는 비로소 위대한 스승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오, 부처님시여….”

그런 아노빠마를 바라보며 부처님이 말했다.

“아노빠마여. 나는 그대가 살아온 지난 나날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밤새 어둠을 밟아 이곳으로 향하는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갸륵하고 숭고한 여정이었다. 그대는 이제 마땅히 당도하여야 할 곳에 이르렀으니, 이제까지 그대를 옭아맸던 첫 번째 족쇄는 끊어졌다.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더는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부처님의 따뜻한 격려에 아노빠마는 걷잡을 수 없는 기쁨에 휩싸였다. 아노빠마는 부처님의 두 발에 입을 맞추는 최고의 예경을 올렸다. 아득해졌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다시 귓전에 들려왔다. 수행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한 채 아노빠마의 주위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그때 아노빠마는 불현듯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깊은 인연이 어떤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아노빠마가 물었다.

“부처님시여. 이곳에 오기 전 저의 생활은 제 자신을 갉아먹는 괴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빈번하게 게워냈고, 몸에 걸친 치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만족과 즐거움이 겨워질 때마다 되레 헐벗은 심정이 되어 별빛을 올려다보곤 했습니다. 저는 항상 알고 싶었습니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시여. 저를 여기로 인도한 그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미소가 아노빠마의 얼굴에 와닿으며 산호처럼 부서져 내렸다. 아름다운 주변의 풍광과 정겨운 새소리가 아련하게 그녀의 감관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노빠마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자애로운 부처님의 음성이 정적을 가르고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잘 들어라, 아노빠마여. 물에 빠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물에 빠진 것도 모르고 가빠 오는 숨에 고통스러워하다 부유하는 널빤지를 부여잡았다. 허우적거림을 멈추고 숨을 가라앉힐 즈음 널빤지는 물에 녹아 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널빤지가 재차 찾아와주기만을 기다리다 결국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조금만 나아가면 뭍이 있었으나, 그는 물에 빠진 사실을 몰랐으니 뭍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아노빠마여, 돌아보라. 그대를 여기로 인도한 그것은 무엇이었는지!”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잦아들었던 모든 것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노빠마를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쾌락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별빛을 좇고자 했지만 그것은 갈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쾌락에 겨웠다 생각했고, 별빛에 닿기 위해 노력했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물에 빠진 것도 모른 채 널빤지의 행운이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노빠마는 눈을 떴다. 별빛이 사라졌다. 두 번째 족쇄가 끊어진 것이다. 부처님이 다시 아노빠마를 향해 말했다. 

“모든 것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어떤 형상도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대는 억겁 가운데 찰나임에도 찰나가 억겁에 이르는 것으로 믿어왔을 것이다. 아노빠마여, 육신과 감각과 마음을 살피고 법을 보라. 저기 뭍이 있다.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노빠마는 그 자리에 앉아 지긋이 눈을 감고 육신과 감각과 마음의 변화를 살폈다. 피부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갔고 허옇게 드러난 뼈가 흙에 섞여 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 쾌락을 혐오했던 마음과 별빛을 갈구했던 마음이 앙상한 것들을 타고 올라왔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아노빠마는 문득 생각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어떤 것도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 모습은 억겁 가운데 찰나이거늘, 나는 찰나가 억겁에 이를 것으로 믿어 번뇌에 휩싸여 있었다.’ 아노빠마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러자 별빛이 사라진 자리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족쇄가 끊어진 것이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보았습니다. 또한 알았습니다. 번뇌의 무더기는 흩어졌습니다.” 

부처님은 아노빠마를 연민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장하다 아노빠마여.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더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제 더는 돌아오지도 않을 것[불환]이다. 그러므로 아노빠마여, 더욱 정진해야 한다. 너에게 완전한 깨달음이 멀지 않았다.”

아노빠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향해 합장한 뒤 우물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우물 안을 내려다보았다. 물은 다가온 것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표면에 비친 얼굴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별빛을 닮아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품어왔던 단도를 꺼내 머리카락 깊숙이 넣었다. 잘려진 머리카락들이 허공을 갈랐다. 아노빠마는 그 자리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위대한 스승 부처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듣고 궁극적인 앎이 성숙했기 때문에 아노빠마는 스승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통찰수행을 시작했다. 그녀는 거기에서 매진하여 차례로 길을 닦아 세 번째 경지 아나함과(불환과, 욕계의 수혹을 완전히 끊어낸 경지.)에 도달했다.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 성자의 경지를 얻은 그녀는 부처님에게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처님은 흔쾌히 그녀의 출가를 허락했다. 부처님의 배려로 아노빠마는 비구니들의 처소로 가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미 오랜 전생부터 쌓아온 큰 공덕과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그녀는 출가 후 이레 만에 완전하게 거룩한 경지, 아라한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천을 성찰하면서 감흥 어린 시구를 읊었다. 

나는 상층의 집안에 태어나

재보가 많고 재물도 많았다.

‘맛자’의 자식인 딸로서 

아름다움과 미모를 갖추었었다. 

왕자들이 청혼했고

부호의 아들들이 탐냈으니

‘나에게 아노빠마를 주시오’라고

아버지에게 사자를 보냈다. 

‘그러한 내가 세상에서

올바로 깨달은 님, 최상의 님, 위없는 님을 뵙고

그 두 발에 예경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 고따마께서 애민히 여겨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으니,

그 자리에 앉아서

나는 세 번째 경지(불환과)를 얻었다.’ 

그 후 머리를 깎고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다.

나에게 갈애가 멸진되었으니,

오늘로 이레째가 되었다.  

   -전재성 옮김 <테리카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