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의 선지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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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의 수행 분위기는 확실히 상원사와 달랐다. 상원사가 웅숭깊은 우물처럼 고요하고 그윽하다면 해인사는 수행대중의 열기가 장작불처럼 뜨거웠다. 해인사는 선의 중흥조인 경허선사가 주석한 이래 선풍(禪風)의 진원지가 되곤 했는데, 그 전통이 해방 이후까지도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갓 출가한 신참 수행자들은 해인사의 활발발한 기운을 좇아서 안거 때마다 찾아들었다. 대중의 치열한 열기도 자신의 구도의지 못지않게 발심의 불을 붙여주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안거 동안 낙오자 없이 용맹 정진하는 데 ‘절반은 수행대중의 힘’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해인사 일주문을 들어선 혜암은 대중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호흡을 골랐다. 산중암자 같은 데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정진하겠다고 원력을 세운 혜암이었지만, 그래도 해인사의 수행 열기는 혜암에게 환희심을 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마음에 화상(火傷)을 입을 것 같은 수행 열기였다. 

 혜암은 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삼배하고 난 뒤, 인곡이 머물고 있는 요사채로 갔다. 인곡은 여전히 요사채 한 방에 머물면서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도 하고 법당에서 때때로 신도들의 천도재도 지냈다. 인곡은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가 혜암을 반갑게 맞았다. 인곡은 한암의 소식부터 물었다.

 “한암스님은 어떻게 지내시더냐.”

 “한밤중만 되면 김칫독에 소금을 뿌리십니다.”

 “그 얘기부터 하는 것을 보니 너도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구나.”

 이번에는 혜암이 인곡의 건강을 궁금해했다.

 “스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나는 퇴설당 좌복이 좋다. 내게는 좌복이 극락 같거든. 건강이 허락하는 한 퇴설당 좌복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인곡은 장좌불와 수행을 하거나 단식정진을 하는 등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스님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요령을 부리며 때때로 편함을 좇는 부박한 스님도 아니었다. 불법을 고마워하면서 자신의 성정대로 순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구경(究竟)을 향해 가는 그런 선승이었다. 그러면서도 대중살림에 보탬이 된다면 장경각으로 올라가 기도하고, 재가 들어오면 법당에서 염불도 마다하지 않는 어진 스님이었다. 

 “스님께서는 벌써 하안거 방부를 들였습니까. 저도 스님 옆 좌복에 앉고 싶습니다.”

 “퇴설당은 이미 방부를 들인 스님들이 많다. 구참 납자들만 해도 벌써 열 분이 넘는다.”

 인곡이 말한 구참 납자란 우봉, 청담, 비룡, 범룡, 홍근, 구산 등이었다. 여기에 각지에서 모여든 신참 비구까지 합하면 이미 60여 명이 넘었다. 해인사에 총림이 개설되고 난 이후 가장 많은 스님들이 방부를 들인 셈이었다.

 “하안거 전에 너에게 숙제를 하나 주겠다.”

 “스님, 무슨 숙제입니까.”

 “수행자에게는 은사도 있고 도반도 있고 선지식도 있다. 수행자는 어떤 선지식을 만나느냐에 따라 길이 달라진다. 선지식이란 눈을 뜨게 하여 빛을 보게 하는 사람이다.”

 “선지식을 찾으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네 눈을 뜨게 하여 빛을 보게 하는 선지식이 누구인지 살펴보아라.”

 “저에게는 이미 스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은사나 도반도 선지식이라 할 수 있지만 내 말이 떨어진 자리를 잘 살펴 보거라.”

 “또 다른 은사님을 찾아보라는 말씀입니까.”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찾아가는 53선지식에는 뱃사공도 있고, 창녀도 있고, 문수보살도 있지만 그건 <화엄경>에 나온 이야기다. 너는 너대로의 선지식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퇴설당에 사시게 될 스님들도 우리 불교의 대들보 같은 분들이다.”

 “퇴설당의 구참 스님들 중에서 찾아보라는 얘기입니까.”

 “퇴설당이 아니라도 네 눈을 뜨게 해줄 선지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인곡은 자신보다 법이 높은 선지식을 퇴설당 안팎에서 찾아보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방에서 물러 나온 혜암은 인곡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몹시 의아해했다.

 ‘은사가 한 분 있으면 그만이지 무슨 선지식이 필요하단 말인가, 또 한 분의 법사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고 혜암은 인곡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인곡 앞에서 분명하게 거절하지 못했으므로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혜암은 인곡의 방에서 나와 해인사 경내를 거니는 동안 스스로 다짐했다.

 ‘스님께서 선지식을 말씀하신 것은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독불장군처럼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정진해왔던 혜암은 인곡이 말한 의미를 비로소 되새겼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닌 것처럼 정진하라는 것이 인곡의 뜻이었다. 그런 생각에 도달하였으므로 혜암은 하안거에 들어 포행 시간을 이용하여 구참 수좌들에게 다가가 자신이 공부한 단계를 점검받거나 애매한 경지를 더 열심히 물었다.

 그러나 혜암은 하안거 기간 동안 ‘이 분이다!’ 하고 마음에 계합되는 스님은 만나지 못했다. 자신의 눈에 낀 미망의 비늘을 어지럽게 떨어지게 하는 스님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혜암은 구참 수좌들을 믿고 의지했다. 퇴설당에서 용맹 정진한 구참 납자들이야말로 누가 보더라도 법당의 기둥 같은 당당한 선승들이었던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혜암과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다른 신참 수행자들이 그분들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혜암은 그분들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까지는 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혜암의 마음속에 한 분이 있다면 오직 오대산 상원사 조실인 한암뿐이었다.

 하안거를 해제한 날이었다. 인곡은 늦은 밤에 공양간 행자를 통해서 혜암을 불렀다. 혜암은 ‘선지식을 만나라’고 당부한 말씀이겠거니 하고 인곡이 주석한 요사채로 올라갔다. 그런데 인곡은 뜻밖에도 혜암에게 또다시 경(經)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올 초에도 강원에서 이력을 보라고 말했던 적이 있으므로 이번이 두 번째의 지시였다.

 “아직도 글을 배울 생각이 없느냐.”

 혜암은 묵묵히 인곡의 말을 듣고 나서는 말했다.

 “스님, 글 속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병에 걸려도 나아버리는 도리가 있다면 글을 배우겠습니다.”

 혜암은 인곡의 권유를 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경이란 밥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뿐, 배부르게 하는 밥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경이란 병을 낫게 하는 처방전일 뿐이지 치료 자체는 아닌 것이었다. 

 다음 날에도 인곡은 혜암을 다시 불러 말했다.  

 “스님이 되어 글을 전혀 모르면 안 된다.”

 그래도 혜암은 인곡의 지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은 교가 아니라 선이기 때문이었다. 혜암은 인곡이 더 이상 권유를 못하게끔 간곡하게 거절했다.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내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되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되 항상 큰 광명을 놓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글을 배워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곡은 눈을 감은 채 어깨를 흔들었다. 혜암에게 굳이 세 번이나 경을 배우라고 하는 까닭은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는데, 제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니 할 수 없었다. 인곡은 경전에 두루 밝지 못한 것을 자신의 단점이라고 종종 생각해왔던 것이다.

 혜암은 인곡이 글을 권유하는 동안에도 벌써 다음에 안거할 선방만 생각했다. 다음 안거는 어디에서 날까 하고 그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이왕이면 선지식이 있는 선방으로 가고 싶었다. 먼저 떠오른 곳은 동산이 조실로 있는 범어사 선방이었다.

 며칠 후. 

 혜암은 범어사로 떠나면서 인곡에게 인사를 했다.

 “스님, 이번 동안거는 동산 조실스님 회상에서 나겠습니다.”

 “왜 범어사로 가려고 하느냐.”

 “해인사에서는 아직 제 눈이 밝지 못해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인곡은 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인곡이 생각하기에는 동산도 한암 못지않은 선승이었다. 더구나 동산은 인곡과 같은 용성 문중의 선사였다. 동산은 용성의 법맥을 이어받은 상좌였던 것이다. 

 인곡은 동산이 용성에게 받은 전법게를 아주 좋아했다. 용성이 범어사 조실로 있으면서 동산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렸던 것이다.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여

 가설로 마음 전함이라 했도다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진주의 무는 길구나.

 佛祖元不會

 假說爲傳心

 雲門餬餠圓

 鎭州蘿蔔長

 그런데 범어사 선방의 질서는 해방이 되면서부터 흐트러져 아직도 어수선했다. 동산이 주석하면서 선풍이 그나마 이어져 오고는 있지만 전국의 이름 있는 구참 수좌들이 선호하여 찾아오지는 않았다. 범어사만의 선풍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혜암도 방부를 들여놓고 실망했다. 대중의 질서가 서 있지 않았다. 선방 일과와 상관없이  아무 때나 선방 문이 열렸고, 심지어 어떤 스님은 외출을 나간 뒤 다음날에야 돌아왔다. 그렇다고 젊은 입승이 나서서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 세우지도 못했다.

 해제 전날에는 선방에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안거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선방을 지킨 사람은 혜암뿐이었다. 동산은 날마다 죽비를 들고 선방에 들었으므로 입승이 따로 보고하지 않더라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입승조차도 산문 밖을 나갔다가 동산에게 들키어 혼이 났던 것이다.

 결국 안거증을 받은 사람은 혜암뿐이었다. 동산은 타협하지 않고 엄격했다. 그 누구에게도  안거증을 주지 않았다. 이런 소문은 곧 해인사 선방까지 퍼졌다. 가장 좋아한 사람은 인곡이었다. 인곡은 제자 혜암이 경을 공부하라는 자신의 말을 거절하고 선방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참선공부를 잘했다는 소문에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인곡은 혜암이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왔을 때 차를 한 잔 우려주면서 칭찬했다.

 “지금부터는 네게 글을 배우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일체 버리고 참선만 하라.”

 인곡에게 격려를 받은 혜암은 크게 고무되었다. 인곡의 방을 나온 뒤 중얼거렸다.

 ‘애당초 내가 출가한 것도 한마음 깨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였지 글공부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잖은가. 불법이란 많이 배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마음 깨치기 위해 있는 것이리라.’

 혜암은 아주 홀가분했다. 이제는 어느 선방을 간다고 하더라도 은사 인곡이 흔쾌히 허락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