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봉규
2021-08-03 (화) 10:25마리산 아이들2
함허동천으로 빠지는 한량고개 소나무 숲의 설경도 좋고, 여우봉과 호랑이봉 사이의 바위 위를 덮은 눈도 좋았다. 지난가을 한량고개에서 여우봉으로 올라가다가 이 바위 위에서 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맑던 하늘과 색색의 단풍이 좋아서였다.
눈구름이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하며 눈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눈구름과 눈보라가 모자를 씌우듯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래쪽은 잣나무와 단풍나무가 많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굴참나무숲이 우거졌다.
정상에 올라가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참성단을 쌓은 옹벽이었다. 옹벽 사이로 난 틈으로 올라가면 참성단이었다. 참성단은 마리산의 정상은 아니지만, 마리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성단에만 올라도 마리산에 갔다 왔다고 말했다.
서쪽과 남쪽은 바다로 완전히 뚫려 있었다. 그 중앙에 참성단이 있었다. 참성단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맞닿은 크고 작은 산맥과 산맥들, 더러는 운하와 같은 해협과 섬과 섬 사이를 뱀꼬리 같은 물줄기가 이리저리 내달렸다. 마리산을 중심으로 산과 물이 커다란 성을 이룬 듯 둘러싸고 있었다. 가까이는 서울의 삼각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세는 끝난 곳을 알 수 없고, 멀리로는 개성 송악산을 포함한 임진강 북쪽의 산들이 그 위를 받치고 있었다.
민우는 뽀얀 안개가 연기처럼 날아다니는 마리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강화도는 서쪽과 남쪽의 바다 방향만 제외하면 전부 산으로 둘러싸여 황소처럼 누워 있었다. 북쪽으로 뻗은 은은한 능선들, 서쪽에 가물가물 나타나는 아지랑이 같은 수평선,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닌데도 민우와 재희는 넋을 놓고 있었다.
왜 산은 저렇게 북쪽으로만 뻗어 있는 것일까?
“가리왕산에서는 호랑이를 키운대?”
“호랑이?”
“스님이 그러시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산에서만 호랑이를 키울 수 있대.”
“그렇게 무서운 데서 어떻게 살아?”
“......”
드디어 마리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
마리산 꼭대기는 참성단보다 조금 높지만, 이어지는 바윗길은 절대로 빼먹어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특히 몽연스님은 이 길을 좋아했다. 여름이나 가을이었다면 민우와 재희는 이곳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널따란 돌길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곳곳에 박힌 바위들은 모두 치마처럼 생겼다.
“조심해!”
“너나 잘 해.”
그러나 재희는 그 말을 하자마자 발을 헛디뎌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재희야!”
민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내려갔을 때, 재희는 옷에 붙은 눔을 털고 있었다. 다행히 키 작은 산철쭉이 많은 곳이었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내가 발을 헛디뎠잖아.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
재희가 오히려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민우에게는 재희의 그런 모습이 더 예뻐 보였다. 재희가 없으면 아무도 말을 붙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침밥을 먹건 말건, 학교를 가간 말건. 민우는 그런 생각을 지워 버리기 위해 앞장을 섰다.
돌길을 지나자 작은 비행장이 나왔다. 헬리콥터가 뜨고 앉는 곳이었다. 숲속에 ‘최석항’이라는 사람이 참성단을 다시 만들었다고 새긴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나왔다. 숲속을 빠져나오면 다시 돌길이 시작되었다. 살얼음이 언 돌길, 중간에 붉은 페인트로 화살을 그은 곳이 나왔다. X표를 한 곳으로 무심코 내려가다가는 벼랑 끝에 서게 된다.
민우와 재희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해마다 이 부근에는 사고가 있었다. 길을 잘 모르는 등산객이 발을 헛디뎌 벼랑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을 위해 조그마한 돌비석이 바위 틈에 설치되어 있었다.
"꼭 잡아.“
“걱정 말라니까.”
재희가 눈을 흘겼다. 민우와 재희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큰 바위들을 지났다. 바로 눈앞에 강화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여름엔 높은 벼랑 사이에 노란 상사꽃이 피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바윗길로 계속 내려갈 수는 없었다.
“꽃이 하나도 없어.”
“겨울에 무슨 꽃이 있어.”
“말라죽은 줄기라도 있어야 될 것 아니야.”
“눈 속에 있겠지.”
민우의 말은 마치 모든 일을 체념한 어른 같은 말투였다. 재희는 그런 민우가 싫었다.
“넌 너무 늙었어.”
“멀지만 이제 숲길로 가자. 여긴 미끄러워서 안 되겠어.”
민우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재희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민우도 알고 있었다. 어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우는 재희가 자기보다도 몇 배나 더 어른스러운 데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작은 키에 갈래머리의 재희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희는 누구한테도 자기 속마음을 내놓지 않는 아이였다.
“나 가면 너도 가자!”
재희가 제법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나 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가자니까!”
재희가 다시 다그쳐 물었을 때, 비로소 민우는 재희를 쳐다봤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재희가 먼저 알고 있었다. 민우의 눈에 자꾸 재희의 빨간 옷이 어른거렸다.
참성단 남쪽 바위 언덕과 서쪽 숲속의 갈림길.
멀리 강화 해협의 물길이 보였다.
민우가 먼저 바위 아래로 난 작은 숲속 길로 들어섰다. 나무들이 모두 바위 뒤에 등을 붙이고 올망졸망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완만한 길이 끝나고, 바위와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눈 세례를 받고 있는 가파른 지역이 나타났다.
이곳은 눈이 오지 않아도 위험한 곳이었다. 바위와 바위 틈 사이로 이리저리 나 있는 길 위에는 반질반질한 얼음판이 눈 속에 묻혀 있었다. 그래서 낭떠러지를 지날 때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드디어 민우와 재희는 그들이 늘 쉬었다가 가는 곰 바위 꼭짓점에 올라섰다. 반 이상 내려온 것이다. 민우와 재희는 나란히 서서 계곡 너머 산비탈의 휘어진 능선으로 몰려오는 눈보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추위도, 위험도 내려갈 걱정도 되지 않았다.
곰 바위에서 정수사까지는 불과 삼십 분의 거리였다. 함박눈이 내렸다고 하지만 한 시간이면 내려갈 수 있는 거리였다. 크리스마스카드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태 보았던 수많은 겨울 풍경을 모두 준다고 하더라도 이 곰 바위 위에서의 풍경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민우의 가슴속엔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누구와 이곳에 올 수 있을까?
가리왕산이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눈 아래 산과 언덕은 짙은 구름에 덮여 갖은 낭떠러지와 바위를 숨기고 있었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건너편 언덕의 소나무 숲은 희끗희끗 사라지고 있었다. 커다란 눈발은 처음엔 잘게 찢은 종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면서 한 떼는 바다 쪽의 소나무 숲 위로 흘러가고, 한 떼는 소나무 숲 아래쪽의 언덕을 타고 넘었다. 종잡을 수 없는 바닷바람 때문이었다.
눈은 골짜기 아래로부터 몰려 올라와서는 산언덕을 쏜살같이 타고 넘었다. 바람의 반란이었다. 이파리 대신 눈이 달린 소나무 끝이, 치불어 올라오는 눈바람에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끄럽다.”
“힘들지?”
다른 날 같으면 돌길로 정수사 쪽으로 내려갔겠지만, 오늘은 왼쪽 숲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바위 위에 내린 눈은 금세 얼어붙고 있었다. 민우와 재희의 발자국이 금방 눈 속에 파묻혔다. 아무리 조심해도 운동화에 눈이 들러붙었다. 날씨가 매섭게 추운 까닭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눈 구경이었다. 굴참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투명했다. 굴참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다시 바위 길이 나타났다. 나무란 나무들은 모두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것 봐!”
재희가 소리를 질렀다.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지만, 재희는 신기하게 가지를 모두 동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작은 산철쭉을 붙들고 탄성을 울렸다. 민우는 지난봄 처음 이곳을 올랐을 때를 떠올렸다. 오른쪽으로는 점점이 떠 있는 바다의 섬들, 왼쪽으로는 진달래 철쭉이 만발한 그 모습을 보고, 비로소 강화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민우는 오직 고향 산내리만 생각했다.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때 벌써 재희는 이 마리산에 스무 번도 더 올라왔다고 했었다. 민우는 눈꽃이 핀 나뭇가지를 흔드는 재희를 힐끗 쳐다봤다. 알 수 없는 응어리가 자꾸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날짜는 정해졌어?”
“잘 모르지만...... 금방......”
재희가 물끄러미 민우를 쳐다봤다. 빠른 속도로 어둠이 오고 있었다. 민우가 다시 길을 잡았다. 바람이 민우와 재희를 자꾸 보챘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눈만 내렸다. 겨우 발목까지만 자란 나무들이 바위 뒤에 몸을 붙인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떡을 포갠 듯한 바위 위에 소나무가 서 있는 그림 같은 풍경도 보이고, 간척지로 일군 남쪽 서쪽의 넓은 들판도 보였다. 그러나 동막리 앞쪽 바다, 각시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민우도 재희도 각시 바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정수사에서 도를 닦던 함허대사에게 아내가 찾아왔으나 공부를 하기 위해 끝내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아내가 바다에 빠져 죽어 각시 바위가 되었다고 했다. 함허대사는 바로 민우와 재희가 살고 있는 정수사와 화개암을 세운 스님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을 끄는 것은 초지진 남쪽에서 북쪽 끝의 월곶돈대에 이르는 운하와 같은 해협이었다. 이 해협은 그 옛날 미국의 군함들이 치고 올라오며 통과했던, 바로 그 해협이었다. 이곳 강화도 해안을 따라 초지진, 광성보, 오두돈대, 용골돈대, 더러미돈대, 갈곶돈대, 서장곶돈대 등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것은 다 그 때문이었다. 민우와 재희가 다니는 선원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여러 돈대로 현장 학습을 가기도 했다. 고향이 강화도인 교장 선생님의 교육 방침이었다.
민우와 재희는 부지런히 걸었다.
뎅! 뎅! 뎅!
드디어 멀리 정수사의 종소리가 들렸다.
“어떡하냐?”
“괜찮아.”
몽연스님은 여간해서 재희를 혼내지 않았지만, 저녁 예불에 참석하지 않으면 바로 매를 들었다. 그래서 재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녁 예불만큼은 꼭 참석해야 했다. 희미한 어둠, 내리자마자 얼어버린 눈들이 사각사각 밟혔다. 기다란 막대기를 길잡이로 삼고 앞장을 선 민우도, 목도리를 풀어 헤쳐서 허리에 맨 재희도 말이 없었다. 키만큼 자란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때렸지만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멀리 김포시와 인천 선착장의 불빛이 반짝였다.
“너 저기 가 본 적 있어?”
“아니.”
“저기는?”
“아니.”
재희의 손가락이 목표점 없이 아무 데나 가리켰고, 민우는 아예 재희의 손가락을 보지도 않았다. 민우는 재희가 뜻 없이 말을 붙이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산 중턱보다 바람이 거칠어졌다. 바다가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해가 지면 바람은 어김없이 마리산 아래로 몰아닥쳤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눈이 계곡 구석진 곳으로 쏠렸다.
“스님한테 매 맞으면... 나도 맞을게.”
“괜찮다니까.”
“스님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해야 되니?”
“난 그런 거 몰라.”
재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재희의 고갯짓에 한 무더기의 눈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재희가 재빠르게 앞장을 섰다. 민우가 막대기를 내밀었다. 재희가 또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부터 재희는 몸이 가벼웠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산에서 산으로 돌아다닌 탓으로 민우보다 몇 배나 빨랐다. 재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민우가 허겁지겁 재희 뒤를 따랐다. 가는 단풍나무 가지가 쌩쌩 울고 있었다.
“불이 켜져 있어.”
재희가 화개암을 가리켰다. 화개암, 콘테이너집. 눈 덮인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민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쳐.”
그러나 재희의 말이 조급한 민우의 마음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넘어졌다. 그리고 굴렀다. 그러나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온몸은 엉망이었다. 잠바도 젖고 운동화도 젖었다. 그것은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민우와 재희의 얼굴은 눈처럼 밝았다.
그러나 컨테이너 집 앞에 섰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민우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무수한 발자국이 있었다.
“이게 뭐냐?”
“......”
“도둑이 들어왔나?”
재희가 민우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민우도 알 수 없었다. 여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발자국들이 방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정수사로 가자!”
재희가 민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엉망이 된 집을 두고 정수사로 갈 수는 없었다.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재희가 재빠르게 걸레를 빨아 왔다. 확실히 재희는 민우보다 손이 빨랐다. 금방 어수선하던 방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무섭지 않아?”
민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만 눈물이 나왔다. 재희가 민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민우도 마지못해 재희를 따라나섰다.
“할머니!”
그러나 공양주 할머니는 민우와 재희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돌아다녀.”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님은요?”
할머니가 민우와 재희를 쳐다보며 눈가를 훔쳤다.
“어쩔고.”
민우는 할머니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재희가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가 방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스님 계셔.”
방 안에서 전화를 받는 스님의 가랑가랑한 음성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되겠소. 그렇지 않아도 내가 그곳엘 갔다 왔어요. 여기서 무려 7시간이나 걸렸어요. 차를 몰지 못하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곳이었소. 난 주지 안 해도 좋으니까 여기 있게 해주시오. 난 못 가요. 못 간다니까. 이 나이에 또 어디로 가란 말이오. 그리고 여긴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딸린 식구들이 많아요. 어린아이도 있고, 움직이지 못하는 늙은이도 있고,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니까 그렇게들 아시오!”
스님이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힐끗 바라본 할머니의 옆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민우는 알고 있었다. 스님은 누가 이 세상 어디에 가라고 하더라도 마다할 분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재희와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스님은 밖으로 나왔다.
“오늘 저녁 예불 참석 못 했지?”
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고 있어?”
스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재희가 재빨리 툇마루 벽에 걸린 버드나무 매를 집어 들어 스님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벽에 손을 짚었다. 스님의 손에 들린 매가 사정없이 재희의 종아리를 후려쳤다. 민우도 얼른 재희 옆에 섰다.
“재희는 아무 잘못 없어요.”
민우의 목소리에 울음이 담겨 있었다.
몽연스님이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돌렸다. 스님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민우와 재희는 나란히 손을 벽에 짚은 채 서 있었다. 스님이 다시 그런 민우와 재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너 왜 그래?”
재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뭘?”
“창피하게 왜 그래?”
할 말이 많았다. 재희는 무엇이 창피한 걸까? 그러나 민우는 대꾸하지 않기로 하였다. 민우가 무슨 말만 하면, 재희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민우와 재희의 얼굴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도 스님과 재희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희가 일부러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밥상 차려놨다. 얼른들 씻고 밥 먹어.”
할머니는 자신의 방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민우는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우리 집에 가자.”
민우가 억지로 그렇게 말했을 때, 재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집은 여기야.”
그러나 재희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민우는 멍청하게 서서 자기를 바라보는 재희를 남겨 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를 쳐다보는 재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여기야.‘ 재희의 그 말이 자꾸 목에 걸렸다.
화개암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멍청하게 마당에 서 있었다.
쌀쌀했다.
하늘은 언제 눈을 뿌렸는가 싶게 별이 총총했다. 정수사 앞마당 불빛이 화개암 텃밭의 하얀 눈을 비추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