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밭의 약속 

 그러던 어느 날, 달이 환하게 밝은 밤이었습니다.

 저녁 공양을 마친 옹이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자주 가는 수수밭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수수밭이 흔들렸습니다. 옹이스님은 잠시 멈춰 서서 수수밭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분명 수수밭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습니다.

 어린 옹이스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검은 그림자는 잘 자란 수수를 꺾어 커다란 자루에 넣고 있었습니다. 

‘아, 바로 그 도둑이구나.’

 옹이스님의 가슴은 마구 뛰었습니다. 옹이스님은 얼른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대로 발이 움직여주질 않았습니다. 옹이스님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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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자루에 수수를 가득 채운 그 그림자가 밭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검은 그림자는 산내암 밑 외딴 집에 사는 한수였습니다. 옹이스님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무꾼인 한수는 마을에서도 착하기로 소문난 청년이었습니다. 더구나 한수는 옹이스님과 제일 친한 달래의 오빠이기도 했습니다. 

 옹이스님은 한수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수도 합장을 하였습니다. 눈빛이 마주친 옹이스님과 한수는 잠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이윽고 옹이스님 앞에 한수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작은 스님!"

 "예."

 옹이스님은 모기만 한 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였습니다.

 한수는 어린 옹이스님의 발을 붙잡고 울먹였습니다.

 "이번 한번만 모른 척 해주세요.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옹이스님은 다시 합장을 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다시는 이런 짓 하지마세요"

 옹이스님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떨렸습니다.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한수는 몇 번이나 옹이스님에게 절을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습니다. 옹이스님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비록 한수와 누구에게도 오늘 본 것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옹이스님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마을에서 한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옹이스님은 그 밤을 홀딱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노스님이 옹이스님을 불렀습니다.

 "어제 마을에 내려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노스님의 말씀을 듣고 옹이스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 아닙니다."

 옹이스님은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인석아, 네 얼굴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써 있는데도 바른대로 말하지 않을 작정이냐? 오늘 아침까지 네 방에 불이 꺼지지 않았단 말이다. 거짓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인 줄 알고 있지?"

 노스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옹이스님은 한수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달래를 봐서도 그건 안될 일이었습니다.

 옹이스님은 잠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노스님, 저 사실은......"

 "사실은?"

 노스님의 눈빛이 부리부리 빛났습니다.

 옹이스님은 눈을 꼭 감았습니다. 도저히 한수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어제 달이 밝아서 두고 온 엄마 생각이 나서 그만......"

 옹이스님은 일부러 양손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제야 노스님이 한껏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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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최수웅

"하하하, 녀석. 달을 보고 엄마 생각을 했다아? 하기야 나도 너만 할 때 달만 밝으면 부모님 생각을 했지. 그렇지만 부처님법을 따르는 불제자가 그렇게 약해서야 어찌 평생을 산속에서 보내겠느냐. 이번만큼은 특별히 용서할 터이니 다음부터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노스님."

 간신히 노스님의 추궁에서 벗어난 옹이스님은 어제의 일을 잊기 위해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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