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1-05-14 (금) 07:5437. 허물없는 깨끗한 마음(virajeṃ)을 유지하라
온갖 일에 닥쳐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근심과 슬픔이 일어나지 않으며, 허물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열반(Nibbāna)을 실현한 성인(ariya)들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열반은 궁극의 경지인 만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피하셨다고 하니까요. 열반을 상세하게 설명하셨다면 그 설명에 대해 제각각의 관점과 개념이 생겨났을 것이고 결국 그 본질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선가(禪家)의 표현을 빌자면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고나 할까요.
열반은 세간을 넘어선 출세간의 경지입니다. 그 경지는 존재계를 넘어서 있고 몸과 마음의 세계를 넘어서 있습니다. 열반은 성인의 흐름에 든 네 가지의 도(道, Magga)와 네 가지의 과(果, Phala)에 속하는 지혜를 통해 실현됩니다. 또한 열반은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의해 관찰됩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네 가지의 도와 네 가지의 과의 대상입니다. 고통의 원인인 오염원(kilesa)이 네 가지 도의 지혜에 의해 완전히 단절될 때 고통도 멸절(滅絶)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직 즐거움(sukha)과 고요함(santi)만이 정신의 흐름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런 아주 특별한 행복과 평화가 열반입니다.
허물(오염원), 즉 빠알리어로 ‘낄레사(Kilesa)’는 더럽게, 힘들게,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낄레사가 마음속에 들어오면 더러워지거나 때가 묻는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힘들어지고, 괴로워지며 뜨거워집니다. 뜨거워지기에 먼저 속이 타거나 상하게 됩니다. 이것이 낄레사의 특성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크고 강한 낄레사는 작고 약하게, 작고 약한 낄레사는 없앨 수가 있습니다. 또한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생겨나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아비담마에서 마음을 마음(citta) 89가지, 마음작용(마음부수, cetasika) 52가지로 분석하셨습니다. 마음작용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서 소멸하고, 마음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마음이 해롭거나 유익하거나 중립적이 되도록 마음에 영향을 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89가지 마음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고, 52가지 마음작용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와 말과 생각을 하도록 마음을 인도합니다. 마음작용 가운데 해로운 마음작용으로 14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이 14가지 해로운 마음작용을 잘 알기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악업을 짓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선(善) 하거나 악(惡) 한 사람은 없습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마음이 선할 때 선한 사람이고 악할 때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변화하는 마음작용들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요.
해로운 마음작용 14가지의 뿌리는 삼독(三毒), 탐·진·치(貪瞋痴)입니다. 악한 마음이 일어났다면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마음이 일어나면, 지금 내 마음이 탐인가? 진인가? 치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만 있을 수 있고 어떤 때는 두 가지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만 있을 때의 마음은 어리석음이고, 두 가지 마음은 탐과 진의 마음이 일어날 때 어리석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염원이 되는 ‘14가지의 해로운 마음작용’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정신과 물질의 3가지 공통된 특성인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모르는, 즉 미혹을 선두로 하는 4가지 마음작용은 어리석음(moha), 도덕적으로 부끄러움이 없음(ahirika), 도덕적으로 두려움(수치심 또는 창피함)이 없음(anottappa), 들뜸(uddhacca)의 해로운 마음 4가지를 우선 들 수 있습니다. 이런 해로운 마음이 있을 때에는 늘 어리석음이 함께 동반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해로운 마음들은 모두 10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탐욕을 선두로 하는 마음 세 가지 마음작용은 어떤 대상에 마음이 붙어 있는 탐욕(lobha, 욕망, 갈애), 남을 무시하는 자만(māna), 업과 업의 결과를 모르는 사견(diṭṭhi)입니다. 성냄을 선두로 하는 4가지 해로운 마음작용은 남을 망가뜨리는 성냄(dosa, 악의),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생기는 나쁜 성향인 질투(issā), 시기심에서 일어난 인색(macchariya), 마음이 삐뚤어진 후회(kukkucca)입니다. 우둔하고 동요하는 것들인 해태심을 선두로 하는 2가지 해로운 마음작용은 게을러지고 무거워 힘이 빠진 상태인 해태(thina), 마음부수들의 안 좋은 상태인 혼침(middha), 회의적 의심(vicikicchā)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면 이와 같은 14가지의 허물이 크게 줄거나 완전하게 사라집니다. 수다원부터 사다함, 아나함까지의 열반에서는 이런 허물들이 대부분 사라지지만 도과(道果)의 단계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허물들은 궁극의 경지인 아라한과에 이르러 일체의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이지요.
<숫타니빠다>의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Kasībhāradvājasutta)'에서 부처님은 파종할 때가 되어 5백 개 가량의 쟁기를 멍에에 묶고 있던 브라만 까씨 바라드와자에게로 가 탁발을 하기 위해 서 있다가 그로부터 “수행자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그대 수행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라는 핀잔의 말을 듣고는 “브라만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시로써 수행자의 경작에 대해 밝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사띠가 나의 쟁깃날과 몰이막대입니다. 몸을 수호하고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不死)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고뇌)에서 해탈합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짧고 평이하게 구성된 내용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매우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확고한 확신과 감각을 제어하는 인내를 통해 믿음과 믿음의 뿌리가 되는 계행 등의 선법이 성장하여 시들지 않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며, 올바른 견해와 사유로 사성제를 증득하여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통찰을 확립하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으로 청정과 겸손을 지탱하고 삼매를 얻으며,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삼업과 몸을 청정하게 유지하며, 사성제로써 온갖 고통과 번뇌를 제거하여 선한 열반을 즐긴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치 <망갈라숫따(행복경)>에서의 행복지침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놓은 듯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우에 따라, 가르침을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비유가 등장하고 수준을 달리하지만, 놀랍게도 한 점 어긋나거나 상충됨이 없이 일정한 흐름이 관통하고 있음을 이 경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열반의 특징은 고요함(santi)입니다. 열반은 죽지 않는(accuti) 역할과 안식(assāsa)을 가져다줍니다. 열반은 표상 없음(animitta)으로 나타나고, 혹은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희론(papaňca) 없음으로 나타납니다. 구경의 목표인 열반은 차별 없이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인 열반도 과거의 업으로 받은 몸과 함께 실현된 것이므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으로써 열반을 증득한 사람의 허물이 가라앉았고 또한 아직 살아있는 몸을 의지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여열반은 그래서 ‘오온이 남아 있는 열반(Sa-upādisesa Nibbāna, Kilesa Nibbāna)입니다. 아라한에게는 비록 모든 허물이 소멸되었어도 정신의 무더기라고 알려진 과보의 마음, 그것들의 마음작용, 업에서 생긴 물질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지요.
성스러운 흐름에 들어 수다원 이상의 도과를 얻은 성인들에게 허물은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도과를 이룬 성인들에게 미세하게 남아 있는 허물들은 반야바라밀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점차 줄어들지언정 새로운 허물이 틈입할 여지는 없는 것이지요. 팔풍(八風)으로 설명되는 온갖 일들이 닥쳐오더라도 물듦 없는 청정한 마음이 유지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금강경>의 유명한 경구인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은 자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그 마음’은 육근에 머물지 않는, 그러니까 감각기관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 곧 청정한 마음을 말합니다. 온갖 일에 부딪쳐도 일체의 허물이 없는 청정한 마음(virajeṃ)이 유지되는 건, 열반을 성취한 성인에게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