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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하는 바가 없는 순간에 지혜가 나온다

                                                 정찬주(소설가)

몇 해 전에 경험한 일이다.

내 산방을 자주 찾아오는 농부가 있는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반야심경>이 어렵다고 하소연을 한다. 

떡 방앗간 주인이기도 한 그는 나에게 2년 정도 꾸준하게 

불교공부를 했던 쌍봉사 청년회 총무다. 

나는 가끔 불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재가불자들이 

왜 <반야심경>을 어려워하는지 스스로 헤아려보곤 한다. 

<반야심경>의 도리를 체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반야심경>을 

수천 번 외운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내 수행과 공부가 부족하지 않은지 먼저 의심을 해본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나 또한 중생이니 혐의는 충분하다. 

내 공부가 완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야심경>의 지혜를 

그들의 손에 쥐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 직관이나 판단을 접고 

스님들이 펴낸 <반야심경> 해설서에 

의지해 보기도 하는데 그 역시 쉽지 않다. 

너무 심오하고 난해하여 해설을 그대로  외워서 전하지만 

듣는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많다. 

외운다는 것은 언젠가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그것은 남의 지식일 뿐 내가 얻어낸 지혜가 아니므로 

살아 있는 활구(活句)가 아니라 죽어 있는 사구(死句) 일뿐이다.

결국 농부들에게는 언어의 문제로 돌아오고 만다. 

<반야심경>으로 가는 길목이라도 알려주기 위해서는 

생활언어로 바꾸어 주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더구나 글을 밥 삼아 쓰는 전업 작가이기 때문에 

언어 문제가 더욱 예민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碍

<반야심경>의 이 구절도 질문을 많이 받는 문장 중 하나이다.

“보리살타가 범어의 보디사트바의 음역(音譯)이고 

줄여서 보살인 줄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얻는 바가 없어야 보살이 되는 것입니까. 

얻는 바가 없어야 보살이 된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절에 다녀도 보살이 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초보자인데도 이 정도 질문이면 농사짓는 농부라고 해서 

대충 설명해 주다가는 스스로 찜찜해서 내내 개운치가 않다. 

“얻는 바가 없으므로 보살은...”

하고 설명해가면 당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무엇을 얻지 않으면 보살이 되는 겁니까.”

이쯤에서 나는 아하! 하고 무릎을 친다. 

직역을 하지 말고 의역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얻는다’를 ‘집착하다’로, ‘보살’을 ‘대자유인’으로 바꾸어 해석해 본다.

“집착하는 바가 없으므로 대자유인은...”

드디어 내게 물어왔던 농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나 역시도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해결의 열쇠는 언어가 쥐고 있다. 

낯익은 언어로 바꾸지 않으면, 생활언어로 바꾸지 않으면 

결코 <반야심경>의 지혜에 다가설 수 없는 것이다.

요즘 시골 농부들의 평균 학력은 고졸 정도다. 

스님들이 언어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불법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수준일 터이다.

“집착하는 바가 없는 대자유인은 

지혜와 하나 된 까닭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물론 진리의 길목을 가르쳐주기 위한 방편으로 

의역한 문장이지만 효과는 제법 크다. 농부들이 미소 짓는다.

한자로 된 <반야심경>의 뜻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겠다며 

집착을 버리는 습관을 들이겠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공의 도리가 뭔지 모르더라도 집착을 놓아버리는 습관만 

들인다면 누구나 조금은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도 소설을 구상하거나 소설 제목을 정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뤄두고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예전에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물고 늘어졌는데 

나이가 들면서 태도를 바꾸었다. 인연도 시절이 있음을 알았다. 

몇 해 전에 발간한 <소설 무소유>도 마찬가지였다. 

법정 스님을 모셨던 명문 대학을 나온 상좌스님 중 한 분은 

<소설 무소유>가 진부하다며 좀 더 신선한 제목을 

붙일 수 없는가 하고 아쉬워했다. 보편성보다는 독창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서두르지 않았다.

어떤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래도 <반야심경>의 ‘무소득(無所得)’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무소유’가 끝내 내 머리와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 중 무언가의 집착에서 나도 모르게 벗어난 시각은 

심연 같은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새벽이 아닌가 싶다. 

무언가에 집착케 하는 요지부동의 통념과 편견의 의식들이 

잠이라는 것을 통해서 무장해제된 시각인 것이다. 

그 순간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시각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유하고 싶은데, 

나는 그 순간의 명료한 의식들을 사랑하고 신뢰한다. 

<소설 무소유>가 실제로 시작된 계기도 그날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내 의식 하나가 나를 격동시켰던 것이다. 

아침햇살처럼 투명한 내 의식 하나가 법정 스님의 고향인 

해남 우수영으로 가라고 나에게 소리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