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 신행 > 신행

『혜암대종사 탄신101주년 다례법회』봉행

염정우 기자 | bind1206@naver.com | 2021-04-29 (목) 08:30

혜암당 성관대종사



『혜암당 성관대종사 탄신101주년 다례법회』를 불기2565(2021)년 5월 3일(월) 오전 10시 30분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봉행한다. 이날 <혜암평전 봉정식>도 함께 봉행 한다. 



 

혜암당 성관대종사 행장

慧菴堂 性觀大宗師 行狀 


1920년(庚申) 음력 3월 22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720번지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은 김원태金元泰이고 모친은 정계선丁桂仙이며 이름은 남영南榮으로 7남매중 차남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은 강직하면서도 자비로웠다. 

1933년(14세) 장성읍 성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리의 향숙鄕塾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수학修學한 후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열람하였으며,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

1936년(17세) 일본으로 건너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던 중 어록을 보다가, 다음 구절에 이르러 홀연히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하고 귀국하였다.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펼치면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큰 광명을 놓도다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1946년(27세) 초봄, 합천 해인사에 입산 출가하여 인곡麟谷스님을 은사로,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고 ‘성관性觀’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출가한 날로부터 평생토록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 두타고행頭陀苦行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하였다. 가야총림선원伽倻叢林禪院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첫 안거를 하였다. 

1947년(28세)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자운·우봉·보문·도우·법전·일도스님 등 20여 납자衲子와 더불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결사에 참여하였다. 

1948년(29세) 해인사에서 상월霜月스님을 계사로 비구계比丘戒를 수지하고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하였다. 

1949년(30세)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보살계菩薩戒를 수지하고 금정산 범어사 동산스님 회상과 가야총림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51년(32세) 초봄에 해인사 장경각에서 은사 인곡스님과 문답하였다.


   “어떤 것이 달마대사가 한쪽 신을 둘러메고 간 소식인고?”  

   “한밤중에 해가 서쪽 봉우리에서 떠오릅니다.”

   “어떤 것이 유마 힐이 침묵한 소식인고?” 

   “청산은 본래 청산이요 백운은 본래 백운입니다.” 

   인곡스님께서 “너도 또한 그러하고 나도 또한 그러하다.” 하시며,

   如何是達磨隻履之消息

   金烏夜半西峰出

   如何是維摩杜口之消息

   靑山自靑山 白雲自白雲

   汝亦如是 吾亦如是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고금에 전해주니

   머리도 꼬리도 없지만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느니라

   只此一段事 古今傳與授

   無頭亦無尾 分身千百億


하시고 ‘혜암慧庵’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이후 범어사 금어선원, 통영 안정사 천제굴闡提窟, 설악산 오세암五歲庵, 오대산 서대西臺와 동대東臺, 태백산 동암東庵 등지에서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더욱 고행 정진하였다.

1952년(33세) 범어사 동산스님 회상에서 하안거 대중 88명 가운데 유일하게 안거증을 받았으며, 천제굴闡提窟에서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도 불구하고 방바닥 한가운데 구들장을 파내고 성철스님과 함께 용맹정진하였다. 

1953년(34세) 봄, 육이오전쟁 말기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설악산 오세암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들어가 고행 정진하였다. 

1955년(36세) 오대산 동대 관음암에서는 적멸보궁까지 6개월 동안 밤낮없이 걸어 다니며 행선行禪 정진을 하였다.

1957년(38세) 겨울, 오대산 사고암史庫庵 토굴에서 방에 불을 때지 않고 검정콩 10알과 한 줌의 잣 잎으로 일종식一種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 용맹정진하며 수마睡魔를 항복받았다. 5개월 동안 초인적인 고행 정진 끝에 주야불분晝夜不分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더니 홀연히 심안心眼이 활개豁開하여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부수니

   해가 돋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

   迷則生滅心 悟來眞如性 

   迷悟俱打了 日出乾坤明


이로부터 동화사 금당선원, 오대산 서대와 북대, 상원사 선원, 지리산 상무주암, 통도사 극락암 선원, 묘관음사 선원, 천축사 선원, 용화사 법보선원 등 제방 선원에 나아가 더욱 탁마장양琢磨長養하였다. 

1967년(48세) 해인총림이 개설됨에 첫 유나維那 소임을 보았다.

1970년(51세) 대중의 요청에 따라 잠시 해인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1971년(52세) 통도사 극락암 선원에서 동안거 중에 조실 경봉스님께서 ‘봉통홍중공峰通紅中空’의 운자韻字에 맞추어 심경心境을 이르라고 하시니,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영산회상의 영취봉이여! 

   만 리에 구름 한 점 없으니 만 리에 통했도다 

   세존께서 들어 보이신 한 송이 꽃은

   천겁이 다하도록 길이 붉으리 

   꽃을 들 때 내가 보았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 불 속에 던졌으리라

   본래 한 물건도 없어 언어마저 끊겼건만 

   천진한 본래 성품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도다.

   靈山會上靈鷲峰 萬里無雲萬里通

   世尊拈花一枝花 歷千劫而長今紅

   拈花當時吾見參 一棒打殺投火中

   本來無物亡言語 天眞自性空不空


1972년(53세) 봄, 수행처를 남해 용문사로 옮겨 정진함에 제방諸方의 납자와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이 모여들어 첫 회상會上을 이루었다. 

1973년(54세) 해인사 극락전에서 철조망을 치고 결사 정진을 하였다.

1976년(57세)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더욱 용맹정진하니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하여 다시 회상이 이루어졌다. 그해 봄 운상선원雲上禪院을 중수重修할 때 먼지 속에서 작업 도중 홀연히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수기授記를 받았다.


   때묻은 뾰족한 마음을 금강검으로 베어내고 

   연꽃을 비춰보아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하라

   塵凸心金剛劘 照見蓮攝顧悲 



혜암당 성관대종사



1979년(60세) 해인사 조사전에서 3년 결사를 시작으로 1990년(71세)까지 총림선원 대중과 함께 정진하였으며, 유나維那·수좌首座·부방장副方丈으로서 해인총림의 발전과 수행 가풍 진작을 위하여 진력盡力하였다. 

 특히 출가 이후 가야산 해인사 선원, 희양산 봉암사 선원, 오대산 상원사 선원, 금정산 범어사 선원, 영축산 극락암 선원, 지리산 상무주암과 칠불암 선원, 조계산 송광사 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당대 선지식인 한암·효봉·동산·인곡경봉·전강선사 등을 모시고 평생토록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며 용맹정진하였으니, 그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두타고행頭陀苦行은 가히 본분납자本分衲子의 귀감龜鑑이요, 계율이 청정함은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라 아니할 수 없다.

1981년(62세) 해인사 원당암에 재가불자 선원(달마선원)을 개설하여 매 안거마다 1주일 철야 용맹정진을 지도했다. 매월 2회 토요土曜 철야 참선 법회를 개최하여 약 500여 회에 걸쳐 참선 법문參禪法門을 설說하는 등 오직 참선 수행으로써 20년 동안 수많은 재가불자를 교화하였다.

1987년(68세)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3년(74세) 11월, 당시 조계종 종정이며 해인총림 방장이었던 성철 대종사께서 열반에 드심에 뒤를 이어 해인총림 제6대 방장에 추대되어 5백여 총림 대중을 지도하였다.

 특히 선원 대중에게는 오후 불식을 여법히 지키도록 하고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적게 먹어라’, ‘안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밖으로 남을 도와라’ 하며 납자衲子로서 철저히 수행 정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매 결제 안거 중에 총림 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1주일 철야 용맹정진 기간에는 노구老軀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도 빠짐없이 대중과 함께 정진하며 직접 후학을 지도하고 경책하였다.

1994년(75세)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조계종 개혁 불사와 1998년 종단 분규사태 시에는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종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1999년(80세) 4월,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되어 종단의 안정과 화합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2001년(82세) 12월 31일 오전,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인과因果가 역연歷然하니 참선 공부 잘해라’고 당부한 후 임종게를 수서手書하였다. 편안히 열반에 드니 세수世壽는 82세요 법랍法臘은 56년이었다.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 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我身本非有 心亦無所住 

   鐵牛含月走 石獅大哮吼

 

2002년 1월 6일 해인사에서 5만여 사부대중이 운집하여 영결식을 종단장宗團葬으로 엄숙히 거행하고 다비茶毘를 봉행하니, 오색영롱한 사리 86과顆가 출현하였다. 100일 동안 사리 친견법회를 봉행하였더니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2007년 12월, 문도들은 친필유고를 모아서 <혜암대종사 법어집Ⅰ,Ⅱ>를 발간하고 해인사 일주문 입구에 위치한 비림碑林에 사리탑과 행적비를 세웠다.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비밀글

이름 패스워드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