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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정윤경

                         공(空)이다, 놓아버려라

                                                      정찬주(소설가)

나는 내 책에 사인을 해줄 때 손님이 

‘한 말씀’을 부탁해 오면 대개 네 가지 중에서 

손님의 처지를 보아 하나를 선택해 써준다. 

첫 번째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두 번째가 신득급(信得及), 

세 번째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네 번째가 방하착(放下着)이다.

다 알다시피 ‘일일시호일’은 운문 선사가 대중들에게

“나는 보름날의 달이 둥글기 전에는 묻지 않겠다. 

단지 보름 후만 묻겠다.“고 말하자 

대중들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선사가 대신 말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두 번째 신득급(信得及)은 <화엄경>에 나온 말씀이다. 

믿으면 성취를 얻는다는 뜻이다. 

당선을 위해 뛰는 지방정치인에게 ‘신득급’을 써준 일이 있다. 

세 번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는 남전 선사의 말씀으로 

한 생각 일으키지 전의 청정한 마음이 도(道)라는 뜻이다. 

번뇌 망상으로 일으킨 생각은 

또 다른 번뇌 망상을 일으킬 뿐인 것이다. 

네 번째의 방하착(放下着)은 아주 바쁜 사람이나 

뭔가 지독하게 집착하고 있는 듯한 사람에게 

써주곤 하는 ‘내려놓다’라는 뜻의 선어(禪語)다. 

승진을 앞두고 스트레스가 심한 어느 회사원이 

내 산방을 찾아왔을 때도 나는 ‘방하착’을 써주었다. 

그 회사원은 몇 년 전 어떤 사건에 휘말려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승진 대상에서 밀리곤 했던 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회사에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었다. 

그 회사원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채 근무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의 분노와 원망까지는 내려놓지 못하는 듯했다. 

또 한 분은 일에만 매달려 앞만 보고 달리는 사업가였다. 

어찌 보면 ‘일중독증’ 환자 같기도 했다. 

일이 그 사업가의 주인이 돼버린 듯했다.

나는 승진 때문에 괴로워하는 회사원과 차를 한 잔 하면서 

‘방하착’에 대해 내 지식을 동원해서 얘기해 주었다. 

방하착은 선종사서의 통사(通史)인 <오등회원(五燈會元)> 세존장에 

흑씨범지(黑氏范志)가 오동꽃을 세존에게 공양했을 때 세존이 

범지를 불러 ‘방하착하라’고 말씀하신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공안집 <종용록> 제 57칙인 ‘엄양의 한 물건(嚴陽一物)’에도 

방하착이란 말이 나온다.

엄양이 조주 선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찌 합니까.”

이에 조주 선사가 말했다.

“놓아버려라.”

그러자 엄양이 다시 물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놓아버릴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지고 가라.”

이 선문답의 핵심은 ‘놓아버려라(放下着)’이다. 

무언가 얻으려 하고, 성취하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말이다. 

그러면 바로 해답이 보일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체가 없는 공(空)이야말로 그 해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