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보기

                    ‘없다’라는 자비로운 백신주사

                                                     정찬주(소설가)

소나무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허물을 벗는구나. 

마당을 거닐다가 가지가 여섯 개인 반송에 눈길이 절로 간다. 

나무껍질이 바람결에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을 처음 본다. 

봄이 되어 소나무가 체중을 불리고 있다는 증거다. 

나 역시 편견이라는 허물, 선입관이라는 허물, 

몸에 밴 타성이라는 허물을 스스로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영혼의 성장뿐만 아니라 풋풋한 사고는 멈추어지고

머리카락만 희어지는 늙은이가 될 것 같다.

나는 혼자 있을 때 불자들이 ‘관세음보살’을 창불하듯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을 외우곤 한다. 

공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각, 지각, 의지, 인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으며 

​

아무 때나 중얼중얼 외우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자꾸 실망했을 때, 내가 편견이나 

선입관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마다 외운다. 

무심코 외우다 보면 ‘무(無)’ 자만 머릿속에 오롯이 남는다. 

마치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고 나니 

모두 다 사라지고 무자만 남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없다’라는 상품의 백신으로 

‘있다’라는 집착의 병에 맞서서 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공의 도리 속에서 사는 관자재보살은 

공이란 항체가 영혼 속에 형성되어 

굳이 ‘없다’라는 상품의 백신을 맞을 필요가 없겠지만.   

15년 전쯤 중국 선종 사찰을 순례할 때이다.

조주 스님이 머물렀던 백림선사를 들른 적이 있다.

백림선사는 처음에는 관음원 혹은 동원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곳은 간화선 교재인 <무문관>의 제1칙이 탄생한 곳이었다.

한 학인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

“위로는 부처님에서 아래로는 개미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습니까?”

나도 조주 스님의 의도를 알 것 같다. 

‘없다’는 답이 아니다. 정답을 스스로 찾아보라는 말씀이다.

조주 스님은 다른 학인에게는 정반대로 ‘있다’고 말한다.

“잣나무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有).”

“언제 성불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

“허공은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여기서의 ‘있다’는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므로

‘없다(無)’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주 스님은 학인이 ‘있다’라는 집착의 병에 걸린 것을 보고

‘없다’라는 백신주사를 자비롭게 놓아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