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봉규
2021-03-30 (화) 08:25재은이와 춤을
첫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정안 스님과 능금이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약간 들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명구하고 능금이가 왔으니 새로 모둠원을 만들어야겠지?”
“와아!”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들은 무슨 큰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눈빛이 빛났습니다. 여태껏 선생님이 정해 준 대로 앉다가 원하는 친구들과 앉으라고 하니 모두들 신바람이 났습니다.
“진작 그렇게 하시지.”
“우리 선생님이 최고야.”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어느 학교, 어느 교실에서나 아이들은 앉는 자리에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친구와 앉기 위해서입니다. 교실은 온통 야단법석입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안 스님하고는 아무도 모둠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능금이는 곧바로 진달래 모둠에 낄 수가 있었지만 정안 스님과 함께 모둠을 하자고 하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그냥 가만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점심시간 전까지 모둠 구성을 끝마치라고 하셨는데..... 정안 스님이 워낙 말이 없어 서기도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머리를 빡빡 깎아서 아이들이 선뜻 친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한 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서 정안 스님은 멀거니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다섯 개 모둠으로 나누라고 하였으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정안 스님을 반장인 재호가 슬쩍 끌었습니다.
“우리 모둠에 붙어.”
“우리만 4명이잖아?”
새침데기 민정이가 입을 뾰로통 내밀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멍청하게 민정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능금이가 걱정스런 눈으로 정안 스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능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남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엉거주춤 정안 스님은 간신히 목련 모둠에 낄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점심시간.
선생님은 책상을 모두 뒤로 밀라고 하셨습니다.
"체육부장, 나와서 준비체조하거라."
체육부장인 수미가 열심히 국민체조 시범을 보였습니다. 체육부장이라서 그런지 수미는 정말 춤을 잘 추었습니다. 단발머리 수미의 멋진 시범이 끝났습니다.
“아주 잘 했다. 여러분들 중에서 국민체조를 혼자서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사람? 반드시 자신 있게 틀리지 않고 할 사람?”
재은이가 자신 있게 손을 들었습니다. 재은이는 정안 스님의 짝이었습니다. 너무 얌전하게 생긴 재은이가 그렇게 춤을 잘 출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생님도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넋 나간 듯 재은이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다음?”
“김명구요.”
“빡빡 머리 애꾸요.”
아이들이 정안 스님을 가리켰습니다. 정안 스님을 골탕 먹이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가장 큰소리를 지른 것은 윤섭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인상이 일그러졌습니다.
“누가 빡빡 머리라고 했어?”
선생님의 목소리는 아주 엄했습니다.
쭈볏쭈볏 윤섭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명구는 절에서 학교를 다니지만 너희들하고 똑같아. 겉모습이 다르다고 사람을 함부로 하는 것만큼 나쁜 것은 이 세상에 없어. 윤섭이 너 오늘 세상에서 가장 나쁜 행동을 했어.”
윤섭이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지. 그러나 사람의 겉모습을 가지고 놀리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잘못이다. 알겠지?"
선생님이 비로소 빙긋 웃었습니다.
“자아, 그럼 김명구. 춤을 한번 추어볼까?”
그러나 정안 스님은 멀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재은이가 살며시 정안 스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정안 스님은 힐끗 능금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선생님, 제가 명구하고 같이 추면 안 돼요?”
선생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안되긴, 너무 좋지.”
아이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정안 스님은 할 수 없이 재은이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포리 초등학교에서 배운 춤을 재은이에게 맞춰 추었습니다.
“야아, 정말 잘 춘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절에서 춤도 가르치나?”
“춤추는 스님들도 있잖아. 커다란 악기를 들고.”
정안 스님은 부끄러운 것도 잊고 한참 몸을 흔들었습니다.
“와아!”
여태껏 그렇게 많은 박수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정안 스님과 재은이의 춤이 끝나자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봤지? 춤은 이렇게 마음대로 추면 된다. 춤은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없어, 자기 마음대로 추는 거야. 명구하고 재은이 정말 잘 했다. 이제 우리 모두 함께 추어보는 거다.”
처음엔 남자애 여자애가 서로 손을 안 잡으려고 했지만 금방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쉬는 시간.
“정말 잘 춘다.”
“누구한테 배웠어?”
아이들이 야단법석을 떨며 정안 스님과 재은이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능금이네 집은 지난 수해 때 떠내려갔다는데......”
“능금이 하고 같이 살어?”
아이들이 정안 스님을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정안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능금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능금이는 살짝 웃으며 정안 스님을 쳐다보았습니다. 정안 스님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어쩐지 재은이와 함께 춤을 추었다는 것이 능금이에게 미안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너희들은 모두 한 학년씩 올라간다. 그만큼 더 의젓해져야겠지. 우리는 학년이 올라가도 교실도 변하지 않고, 선생님도 변하지 않지만 우리들의 마음만큼은 확실하게 변해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부는 꼭 책에 있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이 아니다.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꼭 명심하도록. 이상!”
아이들은 마지막 수업의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정안 스님과 능금이도 천천히 교실을 빠져나왔습니다. 금방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상하게도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오늘 아우라지 강뚝에 서커스단이 왔거든.”
재은이가 나란히 걸어가는 정안 스님과 능금이를 보며 샐쭉 웃었습니다.
“가 볼래?”
능금이가 정안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정안 스님이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사실 능금이도 가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안 스님은 걸리는 돌마다 발로 찼습니다.
“춤춘 게 부끄러워?”
능금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그냥.”
정안 스님은 또 돌 하나를 발로 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돌 하나를 찰 때마다 은학리 할머니의 얼굴과 적멸암 스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봄은 이미 온 산 온 들, 그리고 시냇가의 물에도 소리 없이 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같이 졸업했으면 좋겠다.”
능금이가 엉뚱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정안 스님과 능금이가 가는 길 위에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습니다. 그제야 정안 스님은 왜 할머니와 적멸암 스님의 얼굴이 떠오르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언덕 위에 뽀얗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정안 스님도 능금이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산새들이 울었습니다. 정안 스님과 능금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죽은 산비둘기도 보았고, 꽁꽁 얼어 죽은 너구리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