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흔적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52년이나 지나서, 빡빡머리로 키득대며 웃던 친구들의 소식은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뿐입니다. 남이 느끼는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껴서 그 아픔을 구제해 주는 비무량심(悲無量心)의 경지는 감히 넘볼 수 없고, 내 자신도 이곳저곳에서 아픔이 늘어나기에 “동병상련” 단어가 딱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거동이 부쩍 불편해진 친구의 의기소침을 풀어줄 겸 분당선 전철을 타고 수원에서 인천광역시로 움직였습니다. 이름은 분당선이지만 분당선 철로가 폐지된 협궤열차가 다니던 길인 까닭에 무릎을 맞대고 앉았던 추억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기차를 타고 소래를 오가며 생선을 떼어다 파는 아주머니들의 큰 함지박에서 나는 비린내가 생각나면서 전철에 가득한 젊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감회가 일어났고, 세월의 흐름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기찻길조차도 흥망성쇠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소래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놓았다는 협궤열차를 타고 많은 동창생들이 통학을 했습니다. 그 친구들은 열차의 배차시간이 드문드문한 탓에 담임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자마자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총알같이 교실 문을 빠져나갔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몇 분간 땀 흘리며 뛰어다니던 길이 신흥동이었는데, 아픈 친구를 만나기 전에 신흥동에 소재한 해광사를 찾아갔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부처님을 믿지 아니하였고, 신흥동과는 다른 방향으로 오가는 버스를 타고 통학한 때문에 그곳에 절이 있는지 없는지는 세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크게보기

땅에도 일어나는 성함과 쇠함 

해광사를 찾은 연유는 문병도 할 겸 50여 년 전에 다녔던 학교 길을 걷고 싶었고, 그 인근에 군산 동국사처럼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절이 있다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국운이 쇠퇴하는 조선을 넘보고 열강들이 자기 집 안마당처럼 드나들며 각축전을 벌릴 때, 인천항은 힘없이 개항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그렇게 열린 제물포구(濟物浦口) 인근에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노른자위 땅을 조차지로 설정하였고, 청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도 제각각 자기들의 땅인 양 나눠가졌습니다. 국권 침탈이 가속되면서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증가하였고, 조차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인접한 신흥동까지 주거지가 확산되었을 터이고, 주거지에 자신들의 신앙을 위한 사찰이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타국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종교시설을 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많은 제국주의 국가가 약소국가를 식민지로 삼을 때 종교의 힘을 빌렸음을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축물인 『답동성당』과 우리나라 개신교 첫 번째 교회라는 『내리교회』도 해광사와 몇 분의 걸음걸이로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때문입니다.

넓은 길가 어디에도 해광사를 일러주는 이정표를 볼 수 없었지만 멀리서도 보이는 키가 큰 나무와 종각이 ‘당신이 찾는 곳이 여기 아닌가?’하는 듯 맞아주었습니다. 다행히 빈터이기에 눈에 띄었지 높은 건물이 곧 들어설 것이고, 앞쪽에는 5층 건물이 가리고 있어서 남의 입을 빌리기 전에는 해광사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크게보기

일제가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편리한 신앙생활을 위함인지 또는 조선 백성들을 자기들의 종파로 포교하려함이었는지 화엄사(강점기의 사찰명)는 산지(山地)가 아닌 주거지에 자리하였습니다. 지금은 바다가 잘 보인다는 높은 이름값의 고층 아파트들이 해광사 정면을 가리고 있지만 당시에는 제물포구와 신포(新浦)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인천을 개항하고 제물포구가 점점 커지며 그 옆에 신포가 생겨났는데, 화엄사가 있는 신흥동에 인접한 신포동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지역의 발전 속도가 짐작됩니다.  

낮은 산을 오르는 경사지에 축대를 쌓아 이룬 평평한 바닥을 집터로 삼았고, 축대 위의 낮은 담장은 군산 동국사와 판박이로 똑 같은 모양입니다.

크게보기

절이라도 흥망성쇠는 피할 수 없어

오름길이 끝난 곳에는 담장의 끝자락을 마무리하려 벽돌로 쌓은 두 개의 문설주만 서있을 뿐, 일주문과 천왕문은 없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정원 형식으로 꾸며진 마당에 세워진 종각과 대웅전이 한 눈에 들어찹니다. 순간적으로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붙이고 다녔던 귀찮은 나부랭이들을 떼어버린 몸뚱어리만 본다는 생각이 들었고, ‘네가 여태까지 본 것들 전부는 헛것이야’라는 가르침을 본 것 같았습니다.

크게보기

그와 동시에 일제강점기 때의 사찰이라고 해서 찾아왔건만 ‘언제 그러했느냐?’ 라며 항변하는 우리 전통사찰의 모습에 ‘이렇게 됐구나!’라는 탄성이 나왔습니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처마선의 팔작지붕집 대웅전과 모임지붕을 한 종각은 우리나라가 아니고서는 찾아볼 수 없는 때문입니다.

중앙청이라 불렀던 어마어마하게 큰 돌집 조선총독부 건물도 털어냈는데, 작은 일본 사찰 하나를 허물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도 찾아보면 어디인가 흔적이 있겠지 하면서 호기심을 다시 일궈냈습니다.

가렸기 때문에 보고 싶어져  

종각은 여섯 개의 추녀마루를 가진 육각모임지붕집으로 절병통은 기와가 아닌 화강암을 깎아 세웠고, 접근을 막으려고 나무울타리를 둘렀습니다. 종각 정면 좌측 기둥에 “법성원융무이상”을 시작으로 왼쪽으로 돌면서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의 법성게를 주련으로 걸었는데, 그 다음 구(句)는 울타리에 가로막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그렇지만 나머지 기둥에 “증지소지비여경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의 세 구가 걸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證智所知非餘境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크게보기

많은 선현들께서는 아래와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양이 본래 없고, 모든 법이 부동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다 끊였으니 깨친 지혜로 알 일일뿐 다른 경계로 알 수 없네. 참 성품은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여 자기 성품 고집 않고 인연 따라 나타나네.

보이지 않는 언구(言句) “증지소지비여경”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인지 몇 십 년 전까지인지는 몰라도 종각에서면 넓은 서해바다가 펼쳐보였을 것입니다. 바다라는 이름과 그 바다를 보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의 상(妄想)들을 진실인 것으로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높은 건물로 가로막혀 바다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어림잡아 바다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또 그에 따른 망상까지 일어납니다. 

‘건물이 가로막아 좋은 전망을 버려놓았다’는 생각, ‘내가 못 볼 따름이지, 누군가는 잘 볼 것이다’라는 생각, ‘한겨울에 산비탈로 올라오는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것은 좋을지 모르겠다’등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고 쓸데없는 생각들이지요. 뒤이어 ‘이름과 모양을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것이 영원하고 실체가 아닌 것을 본다면 부처를 보는 것과 같으니라’ 라는 말씀이 떠올랐고, 이 종각이야말로 ‘형상에 집착해서 속지 말고, 진리를 깨치라’며 세워놓은 법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