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1-02-05 (금) 10:0324. 만족할 줄 알라(santutthi)
36년 전, 결혼을 앞두고 주례법사를 모시기 위해 아내와 함께 서울 삼청동 칠보사에 주석하시던 석주 큰스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주례 요청을 드리니, 큰스님께서는 주례 대신 평생 부자로 사는 부적을 주시겠다며 한지 위에 특유의 단아한 필체로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는 글자를 써주셨습니다. 입구(口) 자를 중심에 놓고 오유지족을 한 글자로 합성한 글자인데, 이날 석주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이 글자 늘 거실 벽에 걸려 우리 가족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족한 줄 알라’는 이 글자의 깊은 뜻을 절절하게 깨달은 것은 꽤나 긴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안빈낙도의 삶을 거뜬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석주 큰스님께서 주신 이 ‘부적’ 덕이 아닌가 합니다.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종교가 아닌, 수행정진을 통해 스스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치는 부처님 제자들의 삶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만족한 줄 알고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 출가수행자들이 영위하는 의식주의 수단으로 4의(四依), 즉 네 가지 의지할 곳이 권장되었습니다. 4의는 걸식(乞食), 분소의(糞掃衣), 수하좌(樹下坐), 진기약(陳棄藥) 등 네 가지입니다. 탁발로 얻은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쓰레기장이나 무덤가에 버려진 헌 옷으로 주워 꿰매 만든 옷을 입으며, 나무 밑이나 수풀 등 지붕이 없는 야외에서 자고,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것을 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이보다 완화된 규칙이 적용되었지만,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의 삶은 이 4가지에 깃든 정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산둣띠숫따(Santutthi-sutta, 지족경)에 이와 관련된 부처님의 설법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옷 중에서는 분소의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음식 중에서 탁발로 얻은 한 덩이의 음식이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거처 중에서는 나무 아래의 거처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약 중에서는 썩은 오줌으로 만든 약이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지족할 때 이것이야말로 출가생활(사문됨)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허물이 없고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지족하는 자
거처와 의복과 음식에 대해
마음이 편안하고
가야 할 방향에 구애받지 않노라.
그의 법은 출가생활에 적합하다 일컬어지나니
값나가지 않은 것으로 지족하는 자
공부지음을 성취하리.
수행자들이란 몸과 마음, 즉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과 대상들을 관찰하고, 느끼고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함으로써 일어난 지혜의 힘으로 열반을 성취하고, 해탈을 성취하는 데 지고의 목적을 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이러한 수행의 진전 프로세스를 방해하는 탐진치 삼독(三毒)에 휘말리는 삶을 거부해야 합니다. 열반과 해탈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수행자들이 부질없는 탐욕과 성냄으로 어리석음을 키워 그 성스러운 길에서 벗어날 이유는 없습니다.
지족, 즉 만족할 줄 아는 삶은 팔정도(八正道)에서 올바른 삶, 즉 바른 생계(正命, sammaa aajiiva)에 해당합니다. 바른 생계는 ‘잘못된 수단을 버리고(micchaa aajaava pahaaya) 바른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sammaa aajiivena) 생계를 유지하는(jiivtaim kappeti)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엇으로 생계수단을 삼느냐가 출가자나 재가자를 막론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생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출가자로서는 완전히 바치는 것이 올바른 생계를 이룩하는 방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출가자는 대중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반면 재가자에 바른 생계란 그릇된 생계수단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밋챠 아지와(micchaa aajiiva, 邪命), 즉 ‘그릇된 생계’는 그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일체의 남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해치는 거래관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육류, 주류, 독극물, 무기 그리고 노예 등 사람을 상품처럼 거래하는 따위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이런 거래는 재가자가 반드시 지켜 삼가야 할 근본오계에 반합니다. 그런데 얄궂게도 오늘날 그릇된 생계와 관련된 직업들을 살펴보면 사람 거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거래가 번창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또 생계수단 자체는 떳떳하다 할지라도 이를 과도한 욕심이나 부정한 마음으로 영위할 경우 역시 비난받는 생계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사회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생계의 본연의 모습인 것입니다.
‘지족경’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에서는 욕심이 적은 것[appicchata, 少欲]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santutthi, 知足]을 큰 공덕으로 찬탄합니다. 이 두 가지 공덕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생산적 측면에서도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두 가지 공덕은 그 어느 측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민간 분야뿐만 아니라 정부마저도 확대 일변도의 개발 정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동시대를 사는 모든 생명류의 삶의 터전인 자연이, 현재와 같은 확대 일변도의 성장과정 정책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한계상황으로 치닫는 이와 같은 흐름은 특히 우리 인간이 행동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곧 큰 재난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한계상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전조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나 대기·수질·토양이 오염되어가고 있고 이러한 공해는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지구에 사는 온갖 형태의 생명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바로 오늘날까지 인간이 선택해온 생산 및 소비의 방식과 수준을, 자연이 각자의 표현방식을 통해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꿀벌처럼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꿀벌과 꽃의 아름다운 관계에 대해 잘 파악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올바른 수행자는 사회로부터 최소한의 것을 취하고 많은 것을 되돌려주는 최상의 이타주의자여야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꽃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꿀을 취하는 벌처럼,
성자는 마을에서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법구경>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한 진정한 비구는 비구 생활의 범위 내에서 사심 없이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청빈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꿀벌이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를 다치는 일이 없듯이, 사람도 자연의 풍요로움이나 아름다움을 오염시켜서도 안 되며, 자연에게서 회복력과 활력소를 빼앗아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자원을 활용하면서 올바르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참모습인 것입니다.
확장, 확대, 증산, 개발 따위의 현대적 발전개념은 불교적 가치관과는 상반됩니다. 불교에서 추구하고 권장하는 삶은 그 반대개념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탐욕스러워지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성향은 반드시 파멸을 부릅니다. 부처님께서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역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삶, 지족의 삶을 강조한 것이지요.
부처님은 특히 재가자들에게 근면할 것을, 또 자신이 선택한 떳떳한 직업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 나아갈 것을 권장합니다. 또 바른 방법으로 힘겹게 번 돈을 저축해서 분수에 맞는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나아가 이웃에 보시함으로써 공덕을 지을 것을 가르칩니다.
올바른 생계(정명)를 바르게 실천하면 탐·진·치 삼독의 멸절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강가(갠지스) 강이 동쪽을 향해 흐르듯이 팔정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열반, 즉 최고의 행복으로 향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행복해지는 24번째 지침으로 ‘만족할 줄 알라(santutthi)’, 즉 소욕지족의 삶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 밭에 뿌리고 남은 퇴비를 한곳에 정리했습니다. 내년에 사용할 퇴비를 받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화학비료를 최소화하려면 퇴비를 충분히 뿌려줘야 합니다. 닭똥을 재료로 만들어진 이 퇴비는 제 몸을 썩혀 보다 싱싱하고 튼실한 결실을 가져다주는 존재입니다. 흙과 섞여 땅을 건강하게 하는 퇴비와 같은 삶이야말로 보살의 삶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