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겸손할 줄 알라 

인생 제2막을 농부로 시작했습니다. 400여 평 밭을 경작하는 소작농이지만,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묻기도 하고, 유튜브로 배우기도 하면서 농사를 짓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농사입니다. 특히 태풍이나 폭우, 장마 등 천재지변을 당해 농작물이 피해를 입으면 인간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절감합니다. 이럴 때에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대자연의 위력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집니다. 

현명한 사람은 이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당하지 않고서도 겸손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로는 쉬워도 실제로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낭패를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좀 더 겸손할 걸… ’이라며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고추농사를 제대로 지어보겠다며 온갖 정성을 기울여 고추 1주에 100여 개 가까운 고추가 매달리는 기대 밖의 결과를 얻자 자만하며 좋아하다가, 되레 그것이 비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게 한 원인이 돼 상심했던 지난여름의 아픔이 떠오릅니다. 그때 자만하지 않고 과도한 결실로 도리어 도복(倒伏)의 위험이 증가했음을 간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고추를 지지하는 고춧대를 보강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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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謙), 즉 겸손 또는 겸허함은 옛 성현들도 한결같이 강조했던 가르침입니다. 옛 선조들은 겸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호에 겸손의 의미를 넣기도 했습니다. 겸재(謙齋)나 공재(恭齋)처럼 말이죠. 

“<주역(周易)>에 하나의 도(道)가 있으니, 그것으로 크게는 천하를 지킬 수 있고, 중간 정도로는 그 국가를 지킬 수 있으며, 작게는 그 몸을 지킬 수 있는 바, 곧 ‘겸허함’을 이른다.(易有一道 大足以守天下, 中足以守其國家, 小足以守其身, 謙之謂也)”

전한(前漢)의 경학자 한영(韓孀)이 지은 ‘시경(詩經)’ 해설서 <한시외전(漢詩外傳)>에 나오는 <주역(周易)>에 대한 주공(周公)의 말입니다.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한 마디로 잘 정리하고 있지요. <주역>은 중국 전통문화의 기초이고,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병가, 명가, 음양가 등 제자백가 사상의 중요한 연원이 된 위대한 철학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십에 <주역>을 공부하면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이라는 공자의 말씀을 과문한 터라 미처 알지 못했으나 저는 운 좋게 50대에 중천(中天) 김충렬 선생의 <주역>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그때 들었던 주옥같은 가르침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하셨던 중천 선생의 당부 한 마디 “다 잊어도 겸괘의 가르침은 기억하라. 주역의 핵심은 겸”이라는 말씀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겸손’은 제 인생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좌우명(座右銘) 이야기가 나오니 중국 후한(後漢) 학자인 최원(崔瑗)이 떠오릅니다. 그는 ‘좌우명’이라는 말을 즐겨 썼던 학자입니다. 좌우명이란 자리(座)의 오른쪽(右)에 일생의 지침이 될 좋은 글을 쇠붙이에 새겨 놓고(銘) 생활의 거울로 삼는다는 의미인데, 원래 좌우명의 시작은 문장이 아닌 그릇이었습니다. 공자가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있던 의례용 제기 가운데 ‘기울어진 그릇’을 보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에게 어디에 쓰는 그릇이냐고 물었고, ‘유좌지기(宥坐之器)’, 즉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라고 답변을 들었습니다. ‘유좌’는 속을 비워두면 기울어지는 반면 반쯤 채우면 반듯하게 서고 가득 채우면 자빠지게 만든 그릇입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유좌에 물을 부어 보아라.”고 시켰고, 제자들이 물을 부었습니다. 반쯤 물을 채우자 반듯하게 섰던 그릇이 물을 가득 채우자 넘어졌습니다. 이때 제자 자로(子路)가 앞으로 나서며 “가득 차고서도 넘어지거나 엎어지지 않을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공자는 “왜 그러한 도리가 없겠느냐”면서,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해야 하고, 온 천하를 덮을 만큼 공적이 큰 사람이라고 해도 겸손한 사람처럼 해야 하며, 온 세상을 벌벌 떨게 할 만큼 거대한 용기와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해야 하고, 세상 모든 것을 가질 만한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공손한 사람처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조선의 실학자인 하백원은 ‘유좌지기 잔’을 만들어 계영배(戒盈杯)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이지요. 술을 70%까지 채울 때는 술이 그대로 있지만, 그 이상을 넘으면 술이 없어지도록 구멍을 낸 잔입니다.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이 이 잔을 항상 곁에 두고 과욕을 경계한 덕분에 조선시대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고 하지요.

불가에서도 겸손의 미덕을 매우 중시합니다. 겸손은 마음을 비울 때, 하심(下心)할 때, 스스로를 낮출 때, 낮은 자리에 임할 때 비로소 실행 가능한 지침입니다. 설법을 듣기 전에 입정 의식을 진행하는 것도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의미가 있지만,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알음알이를 다 비우고 빈 그릇과 같이 마음을 비워 오롯이 법문을 담겠다는 겸손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법호를 ‘물러가는 늙은이’, 즉 퇴옹(退翁)이라고 지은 뜻, 청화 스님께서 친견하고자 찾아온 이에게 앉아서 3배를 받지 않고 맞절 1배를 고집한 뜻도 모두 몸과 마음에 겸손이 체화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물며 보배 중의 보배, 목숨 걸고 의지해야 할 최고의 의지처인 담마(Dhamma)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것(nivâto ca)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담마 앞에서 겸손하지 않고 교만했던 대강백 비구를 교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 일곱 부처님 아래에서 삼장법사로 불린 뽀틸라 장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삼장법사가 되어 500명의 제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마에 능통함에 취해서 수행자의 궁극의 목표인 열반과 해탈에 대한 생각을 잊고 사는 뽀틸라를 일깨우기 위해 부처님은 그가 찾아올 때마다 “뚜짜 뽀틸라야 오너라, 뚜짜 뽀틸라야 절하라. 뚜짜 포틸라야 가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뚜짜(tuccha)’는 ‘머리가 텅 빈 쓸모없는 머저리’라는 뜻입니다. 뽀틸라 장로는 부처님께서 자신을 뚜짜라고 부른 것이 교학에 취해 수행을 하지 않아 도과를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꾸짖음임을 이내 깨닫고 곧장 120요자나 떨어진 숲속의 수행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수행하던 30명의 비구들은 그가 여전히 자만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는 ‘감히 대강백을 지도할 수 있겠느냐?’며 지도 요청을 하나같이 거절했습니다. 비구들의 잇따른 거절에 자존심이 꺾인 뽀틸라 장로는 할 수 없이 마지막 남은 7살 사미를 찾아가 의지처가 되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몇 차례 거절하던 사미는 ‘지도에 잘 따르겠다’는 대강백의 다짐을 받고서야 지도에 나섰습니다. 사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연못을 가리키며 “장로여, 가사를 입은 채로 저 연못에 뛰어드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값비싼 웃가사, 아랫가사, 두겹가사를 입고 있는 뽀틸라를 본 사미는 그가 가르침을 잘 따를 겸손한 마음이 되었는지를 시험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뽀틸라 장로는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뽀틸라 장로는 이런 과정을 거쳐 겸허해진 마음상태를 확인받고 사미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담마에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마의 가치를 가벼이 여겨서도 안 되고, 담마에 능통한 것에 대해 교만한 마음을 지녀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머물고 계실 때, 모든 행동에 신중하고 겸손했던 마하깟사빠(마하가섭) 존자의 예를 들어 비구가 마땅히 갖춰야 할 행동거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법하신 일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자의 집에 갈 때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처음 출가한 수행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마하깟사빠는 달처럼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얼굴로 재가를 찾아간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月喩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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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제자로서 건전하고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또한 공덕을 짓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고, 참고 견디는 힘을 기르며, 바르게 정진하고, 사띠(sati)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리하여 반야의 지혜를 성취하려면 마땅히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위대한 보물, 담마를 존중하고 담마 앞에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