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옥아는 조선과 중국 인민군의 우의를 다지는 9.18 승리의 날에 연단에 섰다. 슬프게도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슬픈 분이를 대신하기로 하였다. 관객은 모두 북조선의 인민군과 중국 항일 참전 용사였다. 그들의 말로는 조중연군의 잔칫날이었다.

 

 

 

“우리 항일 연군은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연합투쟁이고 공동투쟁입니다. 특히 농촌 무장투쟁은 모두 조선 동지들 몫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동북에 망명한 조선 동지들은 농촌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조선 농민들과 아주 긴밀했습니다. 그래서 농민을 봉기시켜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가 용이하였습니다. 그래서 9.18 항일 전쟁 승리 때까지 10여 년 간 많은 항일 부대가 창설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 조선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즉 조선 동지가 중국 혁명에 참가한 것이며, 이것은 조선 동지가 중국동지의 혁명을 지지한 것이 중국 동지가 조선을 지원한 것보다 많으며 시간 역시 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혁명 사회 건설의 심화 단계에 있어 보다 서로를 배우고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역사상뿐만 아니라 혁명 투쟁 중에 쌍방은 이미 양국의 정확한 인식의 일치와 행동의 일치를 경험했습니다. 피로써 맺어진 전우이자 동지적 우의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유야 어쨌든 일본군이 물러간 이 땅에 다시 중국군이 들어왔다는 그 자체가 싫었다. 바보 같은 조선 사내들은 틈만 나면 앞다투어 외국 군대를 이 땅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반만년이라고 내세우는 역사에 그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허울 좋은 조중 연합군이 웃고 떠드는 자리. 어리석은 인간들은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연설을 마쳤다. 정치학원에서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또 전조선 공산당 여맹 전국회의에서도 연설하였다. 그러나 이번 연설은 달랐다. 강제가 아니라 그녀의 자발적 연설이었다.
“해방 전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좋고 나쁨을 불문하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어떠한 적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설혹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을 보아도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임시정부를 안 팔면 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우리 인민은 그토록 상해 임시정부를 믿었을까요? 상해 임시정부가 그만한 역할을 하여서였을까요? 아니면 그 당시 우리 인민에게 무슨 커다란 혜택을 주어서였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일반 인민들과 임시정부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습니다. 사실 임시정부가 뭐 하는 데인 줄 모르는 인민들이 더 많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조선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한 남성 동지가 몇이나 있습니까? 몇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몇 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나라 모든 인민의 나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남북으로 분단된 이 나라의 갈 길을 정하는 것 또한 몇몇의 여성 동지들입니다. 그 몇몇의 동지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정예화된 동지 여러분만이 이 나라 이 조국의 앞날을 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남성들이 반만년 동안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우리 여성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 인민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 여성 동지들만이......” 
 비록 전체 줄거리는 참 항일 여전사 김마리아의 연설을 따랐지만 그녀의 어조는 단호했고, 음성의 높낮이는 청중의 가슴을 열었다. 그녀는 언제 어느 자리에서도 당당하고, 열렬했다. 그녀의 연설에 일반 군중들보다 간부들이 열광했다. 그녀는 단숨에 중앙 정치학원이 배출한 빛나는 공산화(共産花)였다. 하여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하지도 못하고 북쪽의 전국을 돌며 연설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김일성에 대한 언급은 일체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남쪽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1948년 4월이었다.
 모두 힘겹게 3.8선을 넘은 위안부들이었다.
 옥아는 자신을 찾아온 여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7명의 여인들, 그들은 모두 일본군의 위안소에 있던 여자들이었다. 대부분 남조선 출신의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을 이끌고 온 여자는 옥아가 썩어 들어가는 손가락을 잘라준 대구의 음전이었다.
“어떻게?”
“갈 곳이 없었어요.”
 그들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고향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선 될 수 있는 대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 북쪽을 찾아왔던 것이다. 허울이기는 했지만 북한의 인민 정권은 여성들에게도 남성들과 똑같이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여성들의 사회적 해방과 남녀평등권 실현을 통한 여성문제 해결을 시도했고, 이로써 토지개혁 때 2만 5700여 명에 달하는 여성 선전원들이 토지개혁 법령을 해설하는 정치 사업을 진행하는 '여성 참여'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업에 옥아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밖에 여성들의 이름에서 일본식 표현인 '子'자(字)를 없애게 하는 등의 친일잔재 청산작업과 성인 여성이 절대다수였던 문맹자에 대한 문맹 퇴치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산업분야의 여성 진출 비율이 해마다 급증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봉건주의와 일제 식민체제라는 이중구조 하에서 착취당한 남쪽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북으로 넘어온 간접적인 동기이기도 하였다. 
 정치학원의 2층 대합실은 금방 눈물바다가 되었다.
“언니 소식을 들었어요.”
 옥아는 음전이를 끌어안았다.
 정치학원의 실무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동무들은 뭐요?”
 정치학원 부부장이 곱지 않은 눈으로 옥아에게 물었다.
“해방되기 전까지 같이 있던 동무들입니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독립운동 했소?”
 옥아는 망설였다. 할 말이 없었다. 일곱 명의 여자가 동시에 옥아를 쳐다보았다. 옥아는 그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모두 일본군의 위안부였습니다.”
 옥아는 건조하게 말했다.
 그동안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던 부부장의 눈에 야릇한 눈빛이 스쳐갔다.
“강옥아 동무도 거기에 있었소?”
“두만강 너머 관동군 제17 대대 기무라 부대.”
 부부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강동무가 회산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줄 알고 있었는데.....”
 옥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어쩔 셈이오?”
 옥아는 눈을 감았다.
“이 사람들도 여기서 함께 공부했으면 합니다.”
 부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강동무가 판단할 일이 아니오. 일단 이 사람들을 학원에서 내보내시오.”
 옥아가 부부장을 노려보았다.
 여자들이 스스로 학원 문을 나섰다.

 

 옥아는 거침없이 학원의 책임비서, 이원길을 만나러 갔다. 문맹이기는 했지만 이원길은 언제나 옥아를 이해했다. 옥아가 중앙 정치학원의 최고 여성 선전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방문을 열자 책상 앞에 앉은 이원길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미 보고를 받은 것이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이원길이 손짓을 했다. 옆에 있던 군관 둘이 흘금흘금 옥아를 쳐다보며 나갔다. 그 옛날 방적공장에서 일본인 앞잡이를 하던 조선인들의 눈빛 그대로였다. 옥아는 빙긋 웃었다.
“보고 들으셨지요?”
“놀라운 일이오.”
 이원길은 똑바로 옥아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강동무에게 기대가 컸는데......”
 옥아는 이원길의 절망을 이해했다.
“제가 일본군 위안소에 있던 여자라서 실망하셨나요?”
 옥아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오. 우린 강동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열찬 독립투쟁을 한 여전사로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런데요?”
“중앙당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소.”
 이원길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옥아는 불현듯 전택경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이원길은 전택경하고는 전혀 다른 생김새지만, 어쩐지 닮아 있었다. 누군가의 지령을 받아야만 사는 사람들. 언제나 그들의 말은 그들의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옥아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중앙당에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옥아의 말은 간단했다.
 이원길은 둥근 러시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사가 필요하오.”
“조사요?”
 옥아는 눈을 감았다. 일이면식 밖에 없는 여자들이 자신을 찾아온 까닭을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고향에 간 그들은 부모형제에게 이런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손발이 떨렸다. 누가 누구를 조사한단 말인가. 그 말은 옥아가 하고 싶었다. 이 땅의 수많은 여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자들. 그들은 다시 옷을 갈아입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조사를 하셔야 되나요?”
“일본군과 친했다면...... 우리 김일성 장군님께서는......”
 옥아의 입술은 파래졌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전택경보다 더 나쁜 사람들. 왕 하나를 세워놓고 5백 년 6백 년의 세월 동안 철저하게 이 강산을 파먹었던 조선 양반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또 다른 왕이 생긴 것이다.
“비서 동지?”
 옥아가 간절하게 불렀다.
 이원길이 길게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모르시나요?”
“알고 있소.”
“그런데요?”
“우린 다른 동무들에게는 관심 없소. 문제는 강동무요. 강동무가 일본 방적공장에서 행한 투쟁과 또 회산선생과......”
 옥아가 말을 잘랐다.
“저도 저 여자들과 똑같이 일본군들의 성노예였어요.”
 이원길이 옥아의 눈길을 피했다.
“강동무, 오늘 일은 우리만 알고 있겠소. 그러면 끝이 아니오? 강동무는 위안소에 없었소. 간도에서 김일성 장군의 휘하 소속 부대로 독립운동을......”
“전 그때 김일성 장군의 이름도 알지 못했답니다.”
“강동무!”
“저는 독립운동 같은 거창한 일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하지요.”
 이원길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제가 조선 여공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옥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지금 강동무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강동무가 아이들 앞에서, 아니면 당원들 앞에서......”
“그렇다면 저는 교단에 서지 않을 겁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저 여자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그녀는 바보같이 스승을, 그리고 회산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까워서 그렇소. 지금 이 북조선에서 강동무만한 여성 동무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렇소.”
 이원길의 정말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은 전택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누대로 소작인을 때려잡은 마름의 자손들. 이제 김일성이라는 주인이 생긴 것이다. 여태 참았던 역 구역질이 올라왔다.
“비서 동지, 제 앞길은 제가 엽니다. 제가 살아오는데 제게 도움이 되었던 조선인은 돌아가신 단 몇 명뿐입니다. 제게는 나라도 없었고, 단체도 없었습니다. 우선 저 여자들이 쉴만한 곳을 찾아주십시오.”
“그러면 약속을 해주시오.”
“약속?”“강동무는 저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오. 알겠소?”
 그러나 대답할 필요도 없이 옥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 그러시다면 남쪽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간단했다. 그것으로 옥아의 모든 꿈은 지고 말았다. 어쩌면 옥아 스스로 일부러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일성에 대한 언급도 그렇지만, 그 시점에서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라는 말을 입에 내뱉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옥아는 남쪽으로 내려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교사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6.25라는 남북전쟁을 만났다.
 이구를 만났다. 

 

 

 패랭이꽃은 꽃 모양이 하층 백성들이 머리에 썼던 '패랭이'를 거꾸로 놓은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패랭이는 양반들이 썼던 거룩한 삿갓과는 그 격이 다르다. 패랭이꽃은 '패랭이에 숟가락 꽂고 산다'고 하여 세간이 아주 보잘것없음을 나타내는 속담에도 들어갈 만큼 민초들을 상징한다. 낮은 곳에만 피었다가, 역시 낮게 지고 만다. 꽃잎은 연자주색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