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임을 보려 하니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과 풀 속에서 우는 벌레는 무슨 원수가 져서 잠마저 깨우는고?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을지라도 칠월 칠석에 매 년에 한 번씩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만나는데, 우리 임 가신 뒤에는 무슨 건너지 못할 강물이 놓여 있기에 오고 가는 소식마저 끊어졌는가? 난간에 기대어 서서 임 가신 곳을 바라보니, 풀에 이슬은 맺혀 있고 저녁 구름이 지나갈 때, 대나무 숲 우거진 곳에 새 소리가 더욱 서럽게 들린다. 세상에 서러운 사람이 수없이 많다고 하지만,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자 신세야 나 같은 이가 또 있을까? 아마도 이 임의 탓으로 살듯 말듯 하구나.  

 

 난설헌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옥아는 동굴에 갇혀 몽롱하게 누워 있었다. 그녀에게 난설헌은 때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옥아는 난설헌을 불렀다. 그러나 난설헌은 아무 말 없이 노래만 불렀다. 난설헌이 당면한 억압의 정체와 싸운 것은 그녀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난설헌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의 여성이, 이 땅 대부분의 인간들이 겪는 고통이었다. 순전히 공명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몇몇 눈 먼 사대부들을 위한 제도와 윤리, 그것이 결국 오늘, 이렇게 참혹한 연대를 만든 것이다. 
 바로 그 때 꿈결에서처럼 소란스러움이 있었다. 옥아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엉금엉금 입구로 나가자 뜻밖에도 회산의 얼굴이 보였다. 이구의 얼굴이 보였다. 옥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눈을 씻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엄연 겨울인데도 바깥은 완연한 봄이었다. 
“스님!”
“옥아야!”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다.
“아씨 스님!”
 이구는 울고 있었다.
 옥아는 이구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이구의 뺨은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빨리 가야해요.”
 용구가 재촉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소리 없는 이동이었다. 옥아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검은 트럭을 탔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어이없이 끌려갈 때와는 다르게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쉬운 길이었다. 스님과 이구는 어떻게 이곳을 찾았을까?
 현실 같지가 않았다. 하기야 명장사를 떠난 이후의 일들은 이미 옥아에게 현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꿈도 아니었다. 종잡을 수 없는 광란의 바람이 휩쓸고 간 한바탕의 남가일몽이었다. 그것은 회산도 마찬가지였다. 회산은 두만강을 건널 때까지 옥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강을 건너고 다시 계림의 백포대 진지로 올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옥아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옥아는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이구에게는 목례 한 번으로 끝이었다. 진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짧은 머리의 옥아를 부둥켜안고 회산과 이구는 목 놓아 울었다.
“기무라 부대에 갔지. 일본군 시체들만 남았두만. 돌아오는 길에 부상당한 조선 병사를 만났어. 동굴에 여자들이 있다고 하두만.”
 회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 많이 변했다. 옥아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회산을 바라보면서 그 짧지 않은 세월이 회산의 정갈함까지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혼자 중얼거리는 분이 아닌데...옥아의 눈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회산도 마찬가지였다. 움푹 들어간 눈, 창백한 얼굴, 예전 옥아의 고운 얼굴은 온 데 간 데가 없었다. 회산은 옥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안고 눈물을 쏟았다. 그들만 운 것이 아니었다. 용구는 뼈만 남은 여자들을 부여안고 눈물을 뿌렸다. 용구는 두 주먹을 쥐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일본군 전 부대에 조선 처녀들이 있답니다.”
 옥아는 멍하니 회산과 이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동굴 속에서 그렇게 씩씩하던 옥아의 모습은 자취가 없었다. 회산과 이구 때문이었다. 예전의 옥아는 없었다. 빈껍데기 옥아만이 덜렁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구는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구는 끝없이 옥아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괜찮았다. 살아만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용구의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두 부대로 나뉘어 진을 쳤다. 한 부대는 얕은 여울을 건너 사잇섬 북쪽에 진을 쳤고, 다른 한 부대는 계림의 망덕 나루터에 진을 쳤다. 한 부대라야 고작 20-30명의 포군들이었지만. 간도로 가는 이주민들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대책 없이 강을 건너던 이주민들이 일본군의 총탄에 무수히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용구는 회산과 옥아, 그리고 이구를 자신의 숙소로 불렀지만, 회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일반 포군들이 상주하고 있는 조그만 마을의 초가 헛간에 자리를 잡았다. 용구가 일부러 밝은 모습으로 들렀다.
“형님, 고집도 어지간합니다.”
“난 여기가 편해.”
 회산은 이구와 사잇섬 강역으로 오는 도중에 무수한 일본군을 보았고, 마을과 들판에 널려진 시체들을 보았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전 함경도 봉기를 막기 위해 조직된 일본군들은 닥치는 대로 마을을 습격했다.
 두만강 일대의 마을들을 헤매는 수많은 아이들...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이구는 보았다. 회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그곳이 어디였던가. 무고한 농민들의 시체가 마을마다 엎어져 있었다. 목이 없는 시체도 많았다. 사람의 머리를 따서 공적을 사려는 일본군들의 만행이었다.
“이제 곧 일본은 물러납니다.”
 용구가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만 회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회산도 그랬지만 이구 또한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옥아가 그런 것처럼 회산은 용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용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따뜻해지면 곧바로 쳐들어갑니다. 저 놈들은 우리를 오합지졸의 농민군으로 알고 있지요. 전 정말로 하늘이 맑은 날 우리의 힘을 보여줄 작정입니다. 이곳만 접수하면 열흘 이상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건널 수 있습니다.”
 용구는 소규모 백두산 전투에서 져 본 적이 없는 명장이었다. 비록 적은 인원의 일본군을 상대했지만 그 신출귀몰함은 관동군의 일등 소속부대도 겁낼 정도였다. 
“기어이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 되겠나? 겨우 90여명으로.”
 그 사이 병사들이 약간 불어나 있었다.
“두고 보십시오.”
 용구가 허연 웃음을 보이며 철벅철벅 걸어가는 모습을 회산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밤 내내 회산은 잠들지 못했다. 그것은 옥아와 이구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 만남, 그러나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구는 그 밤 내내 옥아의 유리잔 깨지는 밝은 웃음소리만을 기억했고, 옥아는 멍하게 구멍 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별을 헤듯이.
 100여명으로 구성된 관동군의 두만강 특별 토벌대는 개화에서 백포군과 맞서고 있었다. 계림 바로 밑이었다. 그들은 대완포 2문으로 무장한 채 동하 뒷산에 진을 치고서 백포군과 대치하였다. 용구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당연히 그것을 바라보는 백포군들도 기세등등했다. 용구만 있으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얼굴들이었다. 
 백포군이 진을 친 막사 앞마당.
“김용구 장군 만세!”
“김용구 장군 만세!”
 포군들이 총과 칼을 치켜세우며 연호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환호를 받으며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며 용구가 나타났다. 머리에 흰 두건을 옹골차게 묶은 건장한 몸집이었다. 보통 때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용구는 천천히 단에 올랐다.
“자아, 여러분 이제 곧 싸움이 시작될 것이오. 우리는 결코 죽기 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살아서 우리의 나라를 우리 스스로 찾기 위해 싸우는 것이오.”
“옳소!”
“만세!”
 용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포군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용구는 부적을 하나 써서 수탉의 가슴에 붙이고 백 보쯤 떨어져 놓게 했다. 
“총은 쏘아도 닭이 맞지 않을 것이오. 모든 부장들은 내 부적의 효험을 믿으시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부장을 시켜 총 세 발을 쏘게 했다. 그런데도 수탉은 한 발도 맞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효험을 믿고 부적을 만들어 옷에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백포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용구의 사술이었다. 농민군이 가지고 있는 구식 총으로는 어느 누구도 움직이는 수탉을 맞출 수가 없었다. 회산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승리는 우리 것이오!”
 용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포군들이 만세를 불렀다.
“김용구 장군 만세!”
 드디어 결전의 날 저녁.
 옥아만 진지에 남겨두고 회산과 이구는 전투에 참가하기로 했다. 물론 총검은 들지 않았다. 부상자들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삼베천을 목에 걸고 십중팔구 죽음 길이 될지도 모르는 출전을 하는데도 옥아는 말이 없었다.
 용구의 백포군은 2-30명으로 나누어 느긋하게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해 진격했다. 선봉에는 언제나 용구가 있었다. 백포군들은 용구를 따라 돌진했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포군은 하룻만에 개화의 앞 뒤 산을 모두 점령했다. 확실한 승리였다. 바로 눈앞이 하서였다. 개화, 동하, 하서를 점령하면 계림 지구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고지가 눈앞이었다. 
 회산과 이구는 대열의 후미에서 용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포군들은 개화를 점령하고서 곧바로 동하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대열을 정비한 일본군은 금방 개화를 분탕질하고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일반 농민들이 얻은 것은 오히려 무참한 죽음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번에는 회산이 용구를 찾아갔다.
 용구는 들떠 있었다.
“내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입가에 한껏 웃음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회산은 용구의 웃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포군들이 얼마나 죽고, 개화의 죄 없는 농민들이 일본군들에게 얼마나 죽었는지 알고 있는가?”
 용구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산은 멈추지 않았다.  
“과연 그 모든 잘못을 자네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형님!”
“내 말을 듣게. 이건 승리가 아니야. 일본군들이 일반 백성들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게. 비단 여기 두만강 일대뿐만이 아니야. 아마 자네가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알려지면 함경도와 간도의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들에게 죽고 말겠지.”
“형님, 두고 보시오.”
 용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난 자네의 앞날이 눈에 보여.”
 회산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용구의 백포군은 곧바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개화를 다시 습격했다. 일본군은 동하로 간 백포군이 다시 돌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몇 명의 경계병만을 남기고 동하로 이동한 일본군은 곧바로 퇴각했다. 개화 전투의 승리 소식은 곧바로 두만강 유역의 마을과 마을로 전해졌다.
 백포군들은 백두산의 덕산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뚜렷한 조직과 구심점이 없었는데, 개화의 소식을 듣고 기세가 크게 올랐다. 모두 개화로 모이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숫자가 무려 150명이 넘기 시작했다. 용구는 이름 그대로 백두산 일대의 확실한 독립군 대장으로 다시 동하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회산과 옥아, 이구는 그대로 개화에 있었다.
“우리만 이러고 있어서야......”
 회산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구가 은근히 말을 붙였을 때 회산은 쓸쓸하게 말했다.
“이것은 잠깐이지. 관동군을 이곳에서 다 몰아내도 조선은 조선이야. 혼자 일어설 힘이 없거든.” 
 그들 셋은 부상당한 백포군들을 치료했다. 회산의 바랑엔 약초 뿌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금방 나았다. 회산은 백포군에 참가하고 나서 첫날 이외에는 한 번도 이구와 함께 자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무명 담요 한 벌을 들고 근처의 산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슥한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회산에게는 언제나 커다란 사발이 들려 있었다. 명장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수를 모시는 일은 회산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 셋은 밤낮으로 부상자들을 돌보러 뛰어 다녔다. 어느새 그들은 백포군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옥아였다. 말 없는 그녀는 잠을 자지 않았다. 언제나 부상자 옆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앞치마는 항상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서 포군들은 옥아만 보면 눈인사를 하였다.
“보살이 따로 없어.”
 그러나 처음과 달리 백포군의 사기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점점 수를 불린 일본군과의 연일 계속되는 전투에 지쳤고, 더구나 뼛속을 파고드는 찬 기운을 머금은 봄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던 것이다. 일본군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은 용구의 백포군은 필사적인 항전을 하였으나 끝내 흩어지고 말았다. 동하에는 300명이 넘는 일본군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열의 맨 끝에서 부상자를 돌보던 회산과 이구도 흩어지는 백포군을 따라 후퇴했다. 이미 용구의 선봉대는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본대를 지휘하여 백포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백포군이 뒤늦게 그것을 알고 계림 쪽으로  달아났지만 총에 맞고 강에 빠져 죽은 백포군이 많았다. 더구나 날은 저물고 비는 계속 내렸다. 백포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엎어졌다. 
“옥아, 어디 있나!” 
 조그만 수로 밑에서 회산이 옥아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구는 문득 자신이 전장의 한가운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옥아는 보이지 않았다. 이구는 수로 밑을 기어 일본군 숲을 빠져 나갔다. 여기저기서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모두 백포군들이 흘리는 비명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도륙이었다. 일본군은 무릎까지 차이는 개울 바닥에다가 30명이 넘는 백포군을 쓸어 넣고 총질을 하고 있었다.

 

 

 회산과 이구는 그 아수라장의 광경을 모두 목도했다. 용구가 일본군 총에 맞아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소문 자체가 이제 김용구 신화가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어쨌든 용구로서는 최초의 큰 패전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백포군은 계림을 버리고 회령으로 나아갔다. 용구는 남은 백포군을 수습하여 철로 공격에 나섰다. 용구는 몇 되지 않는 백포군으로 회령의 철로변을 틀어막고 기차가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차를 타고 많은 일본군 토벌대가 온다는 첩보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투에 참가한 백포군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흙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용구의 작전은 정확했지만 어쩐 일인지 기차가 오지 않았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친 백포군들에게 3월의 날씨는 너무 추웠다. 백포군들은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밥을 얻어먹으러 민가로 내려갔다. 대오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백포군들은 양식이 떨어져 밥을 지을 수도 없었고, 마을 사람들이 일본군 을 피해 모두 피난을 가서 밥을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밥을 지어 가져오면 얼어 터져서 목에 넘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용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끈질기게 일본군이 탄 열차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으나 중요 선로변을 일본 정규군이 호위하는 바람에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부상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용구가 계획했던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용구는 두만강변 어느 곳에도 근거지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백포군들을 데리고 두만강의 작은 사잇섬으로 도망갔다. 독안의 쥐, 사방이 일본군이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용구 진영은 이미 전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이제 일본은 망할 거야.”
 용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백두산 포수대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희생을 남긴 채 거의 전멸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조선쪽의 두만강 일대에서는 일본군들의 잔인한 보복과 응징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회산이 우려했던 그 모든 것들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백포군은 가만 두어도 저절로 자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구는 며칠 밤을 벽을 향해 앉아 기도하는 회산을 보았다. 그리고 회산이 조만간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뒤로 일본군에게 포위된 작은 사잇섬 백포군 진지 앞마당.
 대원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대원들 중에도 부상자가 더 많았다. 회산은 흙으로 만든 도톰한 단상에 올랐다. 회산의 눈은 빛났다. 너무 맑은 얼굴이었다. 막 산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회산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은 돌아가시오. 또 나이가 많고, 어린 장정들도!”
 회산의 말엔 부드럽지만 힘이 있었다. 이구는 멀거니 회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할 때 언제나 웃음을 띤 얼굴. 이구는 침을 삼켰다. 목숨을 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싸움은 끝났소. 모두들 가족들에게 돌아가시오. 끝까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죽음뿐이오.”
 웅성거리던 군중들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바로 그 때였다.
“저 놈을 죽여라!!”
“저 놈은 관동군의 첩자다!”
 용구의 심복들이 외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회산을 잡아 죽이라는 함성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침묵했던 순간은 간 곳이 없었다. 모두들 하늘로 죽창을 올리며 날뛰었다. 살아남은 백포군들의 대부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구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구는 회산이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포군들이 회산을 단상에서 끌어내 묶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렸다.
“죽여라!”
“군법으로 다스려라!”
 그 때 옥아가 앞으로 나섰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회산도, 용구도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모두 평안한 얼굴이었다.
“저도 죽여주세요.”
 포군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 뒤에서 용구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죽고 싶소. 나도 지쳤고, 굶주리고 있소.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 이렇게 모여 일본군과 맞싸운 적이 있소? 이번 싸움은 결코 지는 싸움이 아니오. 우리가 죽어도 지는 싸움이 아니란 말이오.”
“바보 같은 싸움.”
 회산이 용구를 쳐다보았다.
“형님, 그래서 저는 기쁩니다.”
 용구는 울먹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율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우리 셋 모두를 죽여주세요.”
 옥아의 말은 칼끝이었다. 덜고 보탤 틈이 없었다. 용구가 옥아의 손을 잡았다. 옥아는 지그시 용구를 바라보았다. 힘이 났다. 그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잠깐의 치욕으로 하여 마치 생명을 잃어버린 것 같은 얼굴의 자신, 그녀는 비로소 웃고 있었다. 이제 생각할 수 있었다. 가랑잎처럼 목숨을 버리기 위해 총검을 든 사내들이 여기에 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정말 조선 사내들이 여기에 있다. 옥아는 자기 자신을 고무하고 있었다. 철이 들고부터, 그러니까 명장사, 방적공장, 위안소, 그곳에 있으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장면이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제 나라, 제 땅을 위해, 제 여자를 위해, 입에 거품을 무는 동족 사내들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옥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돌았다.
 그 때 군중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장군!”
 젊은 백포군 하나가 서찰을 용구에게 갖다 바쳤다. 용구는 백포군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크게 그것을 읽었다. 
“그대들이 여태까지의 과오를 뉘우치고 항복한다면 우리 대일본제국은 그대들을 일반 백성과 똑같이 감싸고 보호해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서찰을 받고도 우리에게 저항한다면 그대들에게 내일은 없다. 물론 그대들이 머물렀던 모든 장소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처단할 것이다. 백두산 불온분자 특별 토벌대 사령관 사토.”
 용구는 말이 없었다. 쓸쓸하고 어두운 얼굴이었다.
“이제 그때가 왔지!”
 용구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회산에게 다가갔다.
“형님, 난 이곳에서 죽을라오.”
 회산은 눈을 감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