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옥아도, 분이도 총을 잡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을 낡은 트럭이 달리고 있었다. 일본군 트럭이었다. 그러나 그 트럭엔 옥아와 분이를 포함한 항일연군 병사가 타고 있었다. 그중엔 조선인 병사가 옥아와 분이를 포함하여 일곱 명이나 되었다.
“기무라 부대 병력은?”
“얼마 전까지 400명이 넘는 대부대였지만 지금은 거의 철수하고 4-50명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남아 있는 놈들도 모두 지칠 대로 지쳐서 아마 지금 시간이면 모두 골아 떨어졌을 겁니다.”
“그런데도 야마모토란 놈이 다른 데서 여자들을 데려왔어요.”
분이는 조선 병사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조선 병사들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한테 그놈 얘긴 들었습니다. 이곳 인근 마을에서도 그놈이 여자들을 사냥을 했답니다.”
“그놈, 조선 놈인 거 알고들 있지요?”
“그래서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결코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그놈은 내가 죽입니다.”
분이는 이를 갈았다.
“오늘 저녁 그놈 머리를 앞에 놓고 술을 마실 참입니다.”
옥아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행히 며칠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드라이트를 끈 트럭이 질주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갈까요?”
“물론이지. 정문이 오히려 경계가 허술할 테니까.”
일본군 복장을 한 세 명의 병사들이 앞자리에 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일본군 트럭이었다. 옥아는 처참하게 죽은 무연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니시하라와 야마모토의 얼굴을 그렸다. 한참을 무섭게 달리던 트럭이 잠시 멈췄다. 기무라 부대의 정문이었다.
예상대로 트럭은 손쉽게 연병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초병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연병장 끝, 위안소 앞에 트럭을 세운 병사들은 재빨리 내렸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일본군 숙소를 향해 숨어들었다. 병사들은 반으로 병력을 나누어 장교 숙소와 사병 숙소를 둘러쌌다. 그들의 손엔 수류탄이 들려있었다. 대장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폭음이 울렸다. 그 순간 빗속을 뚫고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옥아와 분이도 장교 숙소에 수류탄을 까 넣었다. 싸이렌 소리가 울렸지만 총을 들고 나오는 일본군은 고작 위안소에서 황급히 뛰어나오는 병사들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연군 병사들의 총이 불을 뿜었다. 옥아와 분이는 아수라장이 된 장교 숙소의 문을 열었다. 열 명 남짓의 장교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니시하라가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분이의 총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니시하라를 향해 불을 뿜었다. 총을 든 옥아와 분이는 발로 시체를 차면서 죽은 장교들의 얼굴을 살피고 지나갔다. 분이의 걸음이 한곳에서 멈췄다.
야마모토가 쓰러진 자리였다.
다행히도 야마모토는 다리에만 부상을 입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옥아!”
옥아가 급하게 달려갔다.
놀란 눈으로 야마모토가 옥아와 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향의 아랫목에서 배를 깔고 살겠다더니?”
분이가 뭉개진 야마모토의 상처를 밟았다.
“아악!”
“어떡할까?”
야마모토는 말이 없었다.
분이가 야마모토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오늘 네놈 머리를 삶아줄 것이다. 무연이 머리를 물에 삶았지? 네놈 머리는 기름에 삶아줄 것이다.”
“나는 어차피 죽는다. 그러니......”
그러나 야마모토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분이가 야마모토의 입을 발로 짓이긴 것이다.
“언니, 살려줘.”
“뭐?”
“흐흐, 이놈이 우리한테 한 말이 있잖아.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주겠다고. 우리가 그렇게 해주지.”
옥아가 분이를 쳐다보는 순간, 분이가 가지고 있던 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목불인견, 야마모토의 남은 다리 한 짝이 덜렁거렸다. 야마모토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네놈이 운이 좋아 살아난다면 그렇게 앉은뱅이로 평생을 살아라.”
그때 조선인 병사들이 뛰어들었다.
“빨리!”
사병 숙소의 병사들이 모두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분이는 야마모토의 왼쪽 팔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아악!”
“아마, 넌 죽지 못해서 울게 될 거다.”
옥아와 분이가 연병장으로 나갔을 때 이미 전투는 끝난 상황이었다. 세 명의 초병이 손을 들고 있었다. 의무실에서 낯을 익힌 병사도 보였다. 우습게도 그들은 조선말로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우리는 신사다.”
대장의 손이 떨어졌다.
세 명의 병사가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위안소에서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서둘러. 인근 부대에 연락이 갔을 거다.”
삽화 염정우
그들은 두 대의 트럭에 올라탔다. 아무리 철수하는 일본군이라고 하지만 병력 수에서 비길 바가 되지 못했다. 한 부대 연군들이야 기껏해야 스무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관동군은 일본군 주력부대인 것이다. 정면으로 충돌하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트럭은 달리고 또 달렸다. 여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울고 있었다. 옥아와 분이가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같이 일본군을 받아내던 여자들은 그 동굴에서 모두 죽은 것이다. 옥아는 다시 연군 동굴로 돌아왔다. 여자들은 이미 실신 상태였다.
“이제 우리는 가야 하오.”
대장이 말했다.
“우리도 가자.”
분이가 옥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옥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모두가 같이 움직이다가는 관동군한테 발각됩니다.”
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옥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자, 가서 일본 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자!”
“안 돼. 그 몸으로는.”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시오. 바깥 사정이 좋으면 보름 안에 데리러 오겠소. 식량이 부족할 것이오. 그렇지만 아껴 먹으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요. 우리 말고도 이곳 연군 동굴을 아는 전사들이 올 줄 모르니까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바깥을 나가서는 안 되오. 낮에는 불도 피워도 안 되고.”
대장이 거북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난 간다. 죽어도 간다.”
“언니는 더 움직이면 죽어.”
옥아가 간절하게 말했다.
“난 어차피 죽어.”
“그래도 안 돼.”
옥아는 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컴컴한 동굴 생활이 시작되었다. 행복한 일이었다. 비록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다고 하여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다른 여자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는 데 소비했다.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아는 그들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묻고 듣고 싶은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벙어리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약간의 허기를 메울 수 있을 정도로 먹고는 그대로 누워버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대포 소리와 비행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분이는 점점 기력을 잃고 있었다. 바늘 몽둥이에 입은 상처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죽으면......”
“언니는 죽지 않아.”
분이가 빙긋 웃었다.
“나 죽어도 절대로 울지 마라. 난 행복하게 죽는다.”
옥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묻어줘. 이 불쌍한 몸, 태우고 싶지만 그러면 놈들에게 발각될 테니까.”
옥아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분이는 결국 며칠을 지탱하지 못하고 숨을 놓았다. 우는 사람도 없었고, 울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분이의 시신은 동굴 밑에 묻혔다. 땅을 파기 어려운 계절, 약간의 흙과 낙엽으로 산짐승들의 눈만 피했을 뿐이었다. 옥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며칠을 옥아는 무언가를 또렷하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온다던 연군은 돌아오지 못했다. 다만 부상당한 연군 하나가 돌아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떠났던 연군 전원이 일본군들에게 죽었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몽롱했다.
성냥이 떨어졌다. 불이 꺼지면 밥을 짓지 못하고 생식을 하게 될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굴에서 불 없이 엄한을 견딘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불씨를 보존하는 것이 문제였다. 옥아는 밤이면 동굴 안에 간편한 설비를 하여 놓고 숯을 구웠다. 약간의 숯만 있어도 동굴의 온도가 보존되었다. 약품도 떨어졌다. 그래도 동굴은 얼음집이었다.
하나 둘 만신창이가 된 여자들의 발가락은 얼어 곪기 시작했다. 옥아는 부상자들을 치료할 줄은 몰라도 의사였다. 옥아는 연군이 주고 간 약간의 약초와 통조림을 꺼냈다. 그녀는 약초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초를 달여 소독도 하고, 먹이기도 했지만 효험은 없었다. 두서너 번씩 피고름을 짜냈다. 옥아는 수술 칼을 잡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칼과 돌로써 통조림통을 베고 쓸고 갈고 하여 비교적 정밀한 수술 톱을 만들었다. 대구에서 왔다는 음전이의 썩어 들어가는 손가락을 자르기 위해서였다. 그대로 둔다면 팔 전체와 다리 전체를 잘라야 할 판이었다. 급했다.
“마약이 있었으면?”
음전이가 피식 웃었다.
수술을 시작했다. 음전이의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돋고 온몸은 물자루가 된 듯 땀이 뱄지만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돌렸다. 옥아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칼을 놀렸다. 다음번엔 광주의 연선이 발가락, 그렇게 옥아는 무려 네 사람들의 손발가락을 끊었다. 겨울비가 내렸다. 양식은 이미 떨어졌는데.....
삽화 염정우
1945년 8월 14일. 일본군이 조선 여성들을 한곳에 모았다. 7-80 명이었다. 수로처럼 긴 구덩이가 이미 파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망가지 못했다. 그들은 그 수로 언덕에 세워졌다. 앞에는 일본군 트럭이 서 있었다. 이윽고 뒤로 돌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연이어 요란한 총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여자들이 낙엽처럼 구덩이로 떨어졌다. 일본군은 시체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계속)